페미니즘과 퀴어 이론에 문외한이었던 저로서는 사실 이 책을 읽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새로운 용어와 역사까지 알아간다는 것이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그 속에서 삶이 확장되어지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습니다. 왜 내가 페미니즘과 퀴어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을까에 대해서 생각해보면, 제가 가진 내면의 소수자성과 그 소수자성이 사회에서 잘 받아들여지지 못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저는 세상과 불화한 잘 어울리지 못하는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 세상으로서의 소외를 견디다 자연스레 세상에서 소외되는 것들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된 것 같습니다. 퀴어 페미니즘에 대한 관심을 통해서 저는 이런 저의 소수자 성이 배타적이고 모자란 부분이 아닌 저만의 특성이며 개성임을 이해하게 되는 과정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보다 많은 사람들이 소외되고 차별 받지 않는 넓은 사회가 되길 바랍니다. 그리고 그런 움직임에 참여하고 함께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책을 통해서 페미니즘이 어떻게 생겨났으며, 퀴어이론과 반목하다 어떻게 교차하게 되었는지. 알 수 있었던 의미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끝으로 책을 읽으며 메모 했던 기록을 남겨봅니다. 책을 읽지 않으신 분들은 이 책을 읽어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읽으신 분들에게는 이 메모가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1부 섹슈얼리티
1장 섹슈얼리티의 사회적 구성
킨제이보고서
전체 인구의 10%가량을 동성애자로 보고 있다. 킨제이는 동성애적 정체성 대신 동성애적 행동에 집중함으로써 때때로 본질주의라고 불리는 것에 암시적으로 도전했다. 본질주의적인 설명은 동성애를 사회적 우연성의 산물이라기보다는 인간 조건의 영속적인 특징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본질주의를 수용하는 사람들은 동성애가 역사적, 문화적으로 보편적이라고 흔히 가정한다.
사회적 구성주의
어떤 이론가들은 동성애에 대한 본질주의적 관점이 레즈비언 여성과 게이 남성의 권익에 가장 크게 기여한다는 대중적인 가정에 반대하면서, 그 대신 성적 쾌락과 욕망에 관한 범주들이 역사적, 문화적으로 발전된 것이라 제안한다.
의미론적 전체론
의미론적 전체론에 따르면 다양한 과학 안에서 사용되는 전문 용어는 신념들이 뒤얽힌 망의 일부분이며, 따라서 모든 개별 용어의 의미는 더 많은 어휘와 그것에 상응하는 신념 체계를 직간접적으로 참조함으로써만 완전히 이해될 수 있다.
문화적 차이
몸들은 역사의 도처에서 그리고 여러 문화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관계를 맺었다고 알려져왔다. 그러나 동시대 서구 문화에 특유한 성 정체성 범주를 적용하는 데 필요한 패러다임은 대개 존재하지 않았다.
패러다임을 넘어서
양성애, 동성애, 이성애라는 정체성 범주는 이러한 사례들에 나타난 사람들의 섹슈얼리티에 대해서 중요한 어떤 것을 간과한다. 사랍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고의로 속이는 모든 경우보다, 단지 더 적합한 범주를 사용할 수 없어서 자기 자신이나 다른 이들에게 동성애자, 이성애자로 정체화하는 경우가 아마도 훨씬 더 많을 것이다.
2장 레즈비언과 게이 정체성의 사회적 역사
동성애자 정체성의 사회적 역사들
데밀리오는 동성애자 정체성이 나타난 원인을 사회구조의 변화로 보았고 푸고는 의학 담론의 부상으로 보았지만, 그럼에도 데밀리오가 제시한 동성애자 정체성의 등장 시기는 푸코의 제안과 일치한다. 그러나 19세기의 의학 담론이 당시의 사회적 변화로부터 그 어떤 정보도 받지 않았을 것 같지는 않다. 사실상 가족 농업에서 임금노동으로 이동했던 배경인 산업혁명은 인간의 조건을 향상시키기 위해 과학과 기술을 사용하는 것에 대한 낙관주의적 감각으로 특징지어진다. 그러므로, 산업화, 임금 노동 체계와 동시에 진행되었던 의학 담론의 확산을 단지 우연의 일치라고 하기는 어렵다. 매킨토시와 브레이에 따르면 동성애자 정체성은 훨씬 더 일찍, 그러나 도시가 발달하던 시기에 런던의 발달된 지역에서만 등장했다. 만약 동성애자 정체성이 발전하는 데 산업화와 연관된 도시적인 삶의 양식이 기여했다면, 그것이 잉글랜드의 다른지역이나 미국에 닿기 전에 이러한 특정 지역에 먼저 나타났을 것이라는 지적은 타당하다.
레즈비언 정체성의 사회적 역사들
데밀리오에 따르면 레즈비언 정체성은 게이 남성의 정체성과 같이 오직 전통적인 가족 구조로부터의 경제적 독립과 함께 발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임금노동 체계로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많은 여성은 20세기까지 남성에게 재정적으로 의존하고 있었다. 여성들은 여전히 가정과 가족이라는 사적 세계에 귀속 된 채, 남성 동성애자 역할의 범위가 협상되었던 것으로 보이는 주점과 여관이라는 사회적 세계에 접근할 수 없었다.
여성의 투표권 획득을 위한 제 19조 개정안이 성공적으로 통과된 것은 비록 이로부터 20년이 더 지난 1920년이었지만, 남성의 권위와 특권 체계에 대한 페미니스트의 위협은 세기가 바뀌던 무렵에 확실히 자리잡았다. 여성의 독립과 남성의 권위 및 특권에 대한 위협 간에 이러한 연결성이 있다면 데밀리오, 페이더만, 비시너스가 레즈비언 정체성의 등장에 대해 제사한 설명들은 실제로 양립 가능하다.
레즈비언베이팅이라고 언급한 것의 역할에 주목했다. 여성들이 페미니스트로 정화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페미니스트 정체성을 레즈비언 정체성과 동일시함으로써 동성애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를 이용하려는 시도이며, 흔히 성공적이다. 다른 사람들에 의해 동성애자로 정체화된 여성들은 존재했지마 그럼에도 남성의 응집적이고 인식 가능한 하위 문화에 비해서 응집성이 부족하다. 여성 동성애자 정체성의 사회적 구성에 대해 단일한 설명을 제공하려는 시도가 거의 없었다.
요점은 레즈비언 정체성은 일관적이지도 응집적이지도 않다는 점이다. 다른 성 정체성들에 대해서 다양한 해석이 수용될 여지가 동시대 서양 문화에 있음을 입증한다. 이는 이성애 규범에 순응하지 않는 사람들의 권익에 더 기여하는 해석을 도입하도록 요청한다.
3장 퀴어한 대안들
패러다임과 위기
쿠은 과학 실천에서 그러한 위기의 종결은 필연적으로 세 가지 길 중 하나를 따른다고 주장했다. 철째, 위기를 일으킨 문제는 흔히 패러다임을 미묘하게 개선함으로서 정상과학의 과정 안에서 해결될 수 있다. 둘째, 해결되지 못한 문제는 그것이 결국에는 정상과학의 노력에 굴복할 것이라는 기대와 함께 남겨질 수 있다. 마지막으로, 대안적인 패러다임이 “그것이 수용되기까지의 투쟁”과 함께 등장할 수 있다. 첫 번째 경우에, 문제는 현존하는 패러다임을 수정함으로써 해결된다. 세 번째 경우에, 문제는 현존하는 패러다임을 대체함으로써 해결된다. 문제를 그저 연기했던 두 번째 경우에, 만약 결국 해결이 이뤄진다면 이는 첫 번째 경우가 확장된 것이며, 만약 패러다임이 대체되기 전에 해결이 이뤄지지 않았다면 이는 세 번째 경우가 확장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궁극적으로는 위기 해결을 위해서는 현존하는 패러다임 내부의 변화, 또는 대안적인 패러다임으로의 보다 혁명적인 이행 중 하나가 필요하다.
퀴어이론: 패러다임의 혁명
이처럼 추가와 수정이 계속 필요하다는 사실은 확립된 패러다임을 더 이상 구해낼 수 없음을 암시다한다. 퀴어이론은 전반적으로 그리고 보다 특수하게는 젠더, 섹스, 섹슈얼리티에 관해서 이분법적이고 위계적인 추론을 피한다. 이는 퀴어이론이 정의하기 어려운 이유이기도 하다. 퀴어이론은 단지 더 많이 포함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퀴어 이론은 누군가가 자신을 이해하고 타인들과 관계 맺는데 범주가 유용하거나 심지어는 필수적일 수 있따 해도, 그 어떤 특정한 범주나 범주들의 집합도 그 자체로 필연적이지 않으며 심지어는 가장 깊게 자리 잡은 범주도 수정될 수 밖에 없음을 인정해야 할 지속적인 필요성에 대한 것이다.
2부 섹스
4장 반갑지 않은 개입
두개의 섹스?
섹스 범주에 속할 자격은 주로 생물학적인 조건으로 간주된다. 동시대 과학은 대부분의 경우에 두 개의 기본적인 섹스 범주를 인정한다. 바로 여성과 남성이다. 생식기, 생식선, 염색체 그리고 호르몬은 ㄷ특정한 사람들을 둘 중 하나의 섹스로 범주화되는 주된 기준이다.
인터섹스는 여성 또는 남성에 대한 전형적인 정의에 들어맞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생식 구조 또는 성적인 해부학적 구조를 가지고 태어난 사람이 놓인 여러 상태에 대해 사용되는 일반적인 용엉이다. 누가 인터섹스인 사람이고 또한 누가 의심할 여지 없이 여성이거나 의심할 여지 없이 남성인지에 대해서 합으된 바는 거의 없으며, 그러므로 상황은 복잡해진다.
섹스와 과학
패러다임에 따라 건강한 인터섹스인 사람들은 두 개의잘 학립된 섹스 범주 중 ㅂ하나에 대한 불완전한 표본으로 여겨진다. 과학자들은 인터섹스 현상에 대해 어떤 패러다임을 적용할 것인지 합의하지 못했다. 비록 인터섹스 정체성에 대한 인식과 수용을 촉구하는 운동이 북미에서 진행되고 있지만, 의학계는 여전히 인터섹스 환자들에게 외과적이고 호르몬적인 개입을 하는 데 전념하고 있다. 섹스에 관해서라면 변종은 표준이다. 생물학은 차이를 사랑한다. 그것을 싫어하는 건 사회다.
무엇이 섹스 행위인가?
섹스는 쉽게 정의할 수 없을 정도로 충분히 복잡하다. 실로, 단지 무엇을 섹스 행위의 예시로 포함할 것인지조차 논쟁에 열려 있으며 흔히 맥락 의존적이다. 성적 욕망과 성적 행동의 경계들은 흔히 불명확하며, 섹스 행위를 정의할 수 이쓴 단일하고 권위 있는 필요 충분조건들의 집함이란 없다.
머리 색이 일생에 거쳐 선택적인 변화를 겪을 수 있듯이, 섹스 범주에 속하는 것과 관련된 다양한 트것ㅇ도 그럴 수 있다. 나는 이 유추를 통해 사람들이 흔히 변덕스럽게 머리 색을 바꾸는 만큼 섹스 범주도 그럴 수 있따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인간이 사는 동안 생물학적 특성이 변화할 수 있으며, 흔히 변화한다는 것을 단순히 인정하자는 것이다.
5장 반가운 이행
여성으로 태어난 여성
미시간 여성 음악 축제는 여성으로 태어난 여성이 아닌 모든 이의 입장을 거부하는 정책을 가지고 있다. 이런 정의는 트랜스젠더인 사람들을 배제한다. 이런 정책은 가장 은밀한 형태의 트랜스 포비아다. 이는 여성 공동체를 진짜 여성과 일종의 여성으로 나누며, 모든 여성을 이롭게 하기 위한 투쟁에 사용될 수도 있을 귀중한 자원들을 낭비한다.
트랜스로 정체화하지 않는 페미니스트들은 대개 이런 실용적인 고려 사항들의 중요성을 인정하는 데는 느리고, 원칙에 근거한 반대를 표하는데는 비교적 빠르다. 이 모든 상황이 드러내는 것은 바로 본질주의 페미니즘과 반본질주의 페미니즘 모두가 트랜스 여성들을 향한 부정적인 태도와 감정을 정당화하는 데 사용되어왔다는 것이다.
부치 여성과 트랜스 남성
Mwmf 논쟁은 주로 트랜스 여성의 지위에 관심이 있었지만, 트랜스 남성의 지위를 둘러싼 논쟁도 있었다. 사실상 트랜스 남성과 부치 여성은 모두 페미니즘의 이름 안에서 비펴오디어왔다. 예겈낻 쉴라 제프리스는 섹스 재지정을 훼손하는 수술이라고 부르며 패킹 실천을 남성성에 대한 숭배와 젠더 위계를 종식시키리녀는 레즈비언 페미니슽의 픠로젝트에 승리를 거두었다는 증거로 간주한다. 주디스 핼버스탬이 언급하듯이 일부 레즈비언은 트랜스남성을 적에게 건너가 적이 되어버린 여성 운동에 대한 반역자로 보는 듯하다.
핼버스탬의 두 가지 제안, 즉 첫째로는 부치여성과 트랜스 남성을 구분하는 경계는 계속 진행 중인 협상의 대상이라는 것과, 둘째로는 부치에서 트랜스까지 직선을 그리는 연속체조차 없다는 것을 뒷받침한다. 그 대신, 일반적으로 트랜스 정체성에 적어도 느슨하게 관련되어 있따고 믿어지는 다양한 정체성 범주는 사회적으로 구성되며 끊임없이 협상되는 것으로 보인다.
이분법을 퀴어링!
샌디 스톤은 여성과 남성, 특히 트랜스 여성과 트랜스 남성을 생각하는 하나의 방식을 제공하며, 그것은 기존의 이분법을 퀴어화한다.
이처럼 의도적으로 불협화음을 일으키는 것의 일부분인 새겨넣기와 읽기의 실천을 중시하기 위해서, 나는 트랜스섹슈얼을 하나의 계급이나 문제적인 제3의 젠더가 아니라 하나의 장르로 구성할 것을 제안한다. 이때 장르는 구조화된 섹슈얼리티와 욕망의 스펙트럼들을 생산적으로 붕괴시킬 가능성을 가졌으나, 그 가능성이 아직 탐색되지 못한 체현된 텍스트들의 집합이다.
기존의 이분법에 도전하는 방법으로 좀 더 마음에 드는 것은 단 두 개의 범주가 아닌 많은 범주가 존재하도록 추가적인 대안들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퀴어 이론은 이런 방ㅎ식으로 이분법에 도전함으러써, 확립된 범주들에서 상대적으로 문제를 겪지 않는 사람들 뿐 아니라 문제를 겪는 사람들의 경험 또한 긍정하는 동시에 본질주의에 저항할 수 있다.
제 3부 젠더
6장 변화하는 젠더
섹스와 젠더의 구별
1970년대의 일부 페미니스트 학자들은 여성과 남성의 사회적 차이를 생물학적으로 타고난 차이와 구별하여, 언어학에서 차용한 용어인 젠더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생식기 구조는 생물학적인 반면 옷을 입는 방식과 몸단장 습관은 사회적이라고 많은 이가 생각하는 점은 명백해 보인다. 그러나 여성과 남성의 구별과 관련한 많은 특징 중 어떤 것들에는 명확한 흡아긔 존재하지 않는다. 섹스와 젠더를 구별한다는 단순한 인식은 어떤 차이가 섹스차이고 어떤 차이가 젠더 차이인지 밝히지 않는다. 다시 말해. 섹스와 젠더의 차이는 일반적으로 그 자체로 여성과 관련된 어떤 특징이 여성적 섹스에 속하고 어떤 것이 여성적 젠더에 속하는지 결정하지 못한다.
젠더 중립적 언어와 젠더 포괄적 언어
하나의 용어가 모든 다른 범주의 사람들을 똑같이 가리키는 데 사용될 때, 언어는 중립적이다. 복합적 용어가 둘 이상의 그리고 이상적으로는 관련된 모든 범주의 사람들을 개별적으로 그리고 구체적으로 지시하는 데 사용될 때, 언어는 포괄적이다.
이분법을 퀴어링
젠더가 수행적이라는 생각은 헤게모니적 이분법을 유지하는 것이 능동적 과정임을 상기시킨다. 헤게모니적 이분법을 유지하는 것은 저극적인 과정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개인으로서도 집단으로서도 헤게모니적 이분법을 의도적으로 방해하는 표현의 형식을 선택할 수 있는 힘을 갖는다. 이것은 기존 언어를 퀴어링하는 방법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동사로 사용되는 퀴어는 헤게모니적 이분법과 관련된 생각, 기대 및 태도의 불일치에서 벗어나기보다는 그러한 불일치에 주의를 집중시키는 과정을 의미한다. 헤게모니적 이분법을 붕괴시키는 것은 비록 아주 조금일지라도, 패러다임을 퀴어화 하는 데 기여한다.
7장 역동하는 페미니즘
페미니스트의 사유와 행동
페미니즘은 단지 학문적 활동이 아니다. 페미니즘은 실제 사람들의 살아 있는 경험에 응답할 뿐만 아니라 그 경험의 형태로 존재한다. 페미니즘에 관한 사회 및 정치운동을 하는 사람들의 생각꽈 행동은 여성학 및 관련 학문 분야에 잇는 페미니즘 학계 종사자들의 담론에 영향을 미치며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사실 페미니즘 사회 정치 운동에 몸담은 이들과 페미니즘 학계에 몸담은 이들은, 때로는 같은 사람들이다.
페미니즘 이론
자유주의 페미니즘은 출생 시의 우연이 권리와 기회 같은 무형의 재화를 포함한 재화의 불평등한 분배를 정당화할 수 있다는 논의를 거부한다. 자연이 여성의 종속적 지위를 보장한다는 개념을 거부함으로써 자유주의 페미니즘은 세긋와 젠더를 구별한다. 앨리스 워커는 백인 지향적이고 때로는 이종차별주의적이기까지한 주류 페미니즘에 대한 대안으로서 우머니즘을 논리정연하게 설명했다. 레이철 퍼지는 우머니즘을 자유주의 페미니즘이라는 더 큰 제목 아래에 열거하는데, 아마도 우머니즘이 자유주의 페미니즘과 해방 전략에 대한 관심을 공유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자유주의 페미니즘과는 달리 우머니즘은 교차성을 다룬다. 교차성은 흑인 여성의 삶에 인종, 젠더, 계급이 동시에 미치는 영향을 나타내기 위해 처음 사용되었고 이러한 동시적 영향이 단지 젠더와 인종의 총합으로 환원할 수 없는 독특한 경험을 창출한다는 인식을 동반한다. 또한 정체성, 민족성, 장애 상태등, 교차하는 다른 정체성과 관련하여 사용되어 왔다. 마르크스주의가 자본주의를 억압의 근원으로 규정한 것처럼,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은 자본주의를 여성 억압의 근원으로 규정한다 마르크스 페미니즘은 여성 억압을 경제적 억압의 하위 범주로 축소했다고 비난받았다. 경제 모델에서 강간은 재산권의 문제로 해석된다. 섹스는 성적으로 자격이 없는 남성과 여성 간에 부당한 소유 행위로서 발생하는 경우에만 강간이 된다. 이러한 이유로 매키넌은 급진적 페미니즘을 채택하고 이성애 관계에 내재한 권력 대칭의 대안으로 자발적 레즈비어니즘을 옹호한다. 모든 급진적 페미니스트가 이성애에 반대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성애가 역사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데는 동의하는 편이다. 일부 급진적 페미니스트들은 남성이 여성을 억압하는 가부장제가 남성 생물학의 본래적 결과라고 믿는다. 이것은 트랜스 여성은 남성일 수밖에 없다고 간주하는 급진적 페미니스트들의 트랜스 배제적 태도를 설며앻준다. 이는 흔히 트랜스 배제적 급진 페미니스트라고 불리는 급진적 페미니즘의 소규모 분파다. 사회주의 페미니즘은 마르크스 주의와 급진적 페미니즘의 종합으로 출현한다. 사회주의 페미니즘은 마르큿주의 분석에서의 계급의 우외와 급진적 분석에서의 섹스의 우위성에 반대하는 대신에, 여성 종속의 이유를 자본주의와 남성의 성적지배에서 찾는다. 다문화 및 글로벌 페미니즘은 백인 미국인의 주류 문화 밖에 있는 여성들의 살아 있는 경험에 대한 관심과 존중을 표명한다. 다문화 페미니즘은 때때로 유색인 여성 페미니즘 이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이는 인종적 민족적으로 소수자인 여성드링 그들의 문화적 정체성에 젠더, 인종, 계급, 섹슈얼리티가 교차하면서 발생한 결과로서 경험하게 되는 독특한 문제를 다룬다. 글로벌 페미니즘은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의 영향을 검토함으로써 여성 문제에 대한 분석에 국제 정치학을 가져온다. 제2물결이 생산한 페미니즘 이론과 젙통적인 레즈비언 및 게이 연구와 관련된 아이디어 사에는 상당한 긴장이 있다. 제2물결에서 보다 급진적 페미니즘과 관련된 슬로건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이다. 에 대한 또 다른 해석은 사회 제도, 특히 강요된 이성애가 남서엥 의한 여성 억압을 영속시키고 가오하한다는 것이다. 이 입장에서는, 자발적 레즈비어니즘은 찬성되며 어생애는 거부되어야한다. 레즈비언은 정치적 저항의 한 형태로 선택될 수 있고, 또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 된다. 이는 레즈비언과 게이 권리 운동에서 성적지향의 선청성이라는 사실상의 만장일치 합의에 반대한다.
페미니즘 철학
궁극적으로 지배 논리에 대한 에코페미니즘의 비판은 구체적으로는 가부장제, 더 일반적으로는 주인지배제에 대한 비판이다. 가부장제가 성차별적 억압을 나타내듯이 주인지배제는 동시대 서양 문화의 태도와 관행에 널리 퍼진 지배 논리를 구성하는, 다양하며 교차하는 형태의 억압을 더 광범위하게 지시한다. 에코페미니즘의 지배 논리 비판은 서양 철학 전통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진다. 서양 철학의 전통은 다른 모든 것을 지배하는 인류 이성의 월성, 그리하여 인간 종의 우월성을 확립하는데 헌신했다. 페미니즘 인식론은 인간의 이성과 합리성의 권력과 범위를 다루고 현대 서구 사상에 추가적 비판을 가해왔다. 페미니즘 경험주의는 과학적 중립을 신뢰한다는 점에서 논리 경험주의와 공통점이 있으나, 성차별주의와 다른 형태의 편견들을 쉽게 피할 수 있다는 점은 부정한다. 페미니즘 경험주의는 주로 남성 과학 공동체가 여성을 왜곡하거나 무시하고 결과적으로 잘못된 결론을 내린 수 많은 사례를 폭록했다. 페미니즘 경험주의가 모든 합리적인 행위재가인식론적으로 동일하다는 전통적인주장을 반복하는 반면, 페미니즘 입장론은 사회적 경계가 인식론적 경계로 작용할 수 있으며 인식론적 행위자는자신이 접근할 수있는 종류의 지식만을 추구한다고제안한다. 입장론은 지배받는 사애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 억압하는 자들보다 더 완전한 시각을 가진다는 제안을 마르크스주의로부터 차용한다. 이러한 설명에서 인식론적 공동체는 지배 집단 또는 중심부, 피지배 집단 또는 주변부로 구성된다. 주변부에 살면서 우리는 현실을 보는 특별한 방법을 개발했다. 우리는 바깥쪽에서 안쪽을 보았고, 안쪽에서 바깥쪽을 보았다. 우리는 주변부뿐 아니라 중심부에도 주의를 집중할 수 있었다. 우리는 둘 모두를 이해했다. 페미니즘 경험주의아 달리, 입장론은 교정적이고 특권적인 관점이 사회적 주변부에서만 성취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일반적으로 포스트 모더니즘과 특히 포스트모던 페미니즘에 있어 절대 진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사실과 허구를 구별하려는 모든 시도는 증거나 논리에서처럼 이념과 가치에 바탕을 둔 정치적 계획이다. 포ㅡ트모던 페미니즘에는 섹스나 젠더에 대한 근본적인 진실이 없다.
퀴어이론
일각에서는 성차별이 더 이상 중요한 문제가 아닐 정도로 제2물결 페미니즘이 충분히 성공적이었다고 주장하면서 제3물결 페미니즘 개념에 도전하는 반면, 다른 일각에서는 제2불결이 아직 그 작업을 완수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면서 제3물결 페미니즘 개념에 도전한다. 페미니즘은 게이 남성 정치의 정치 이론으로도 꽤 많이 사용되었지만 잘 작동하지 않았다. 게이 남성의 행동은 실제로 페미니즘의 인허가 승인을 거의 받지 못했다. 게이 남성 문화의 실제적인 실천의 대부분은 많은 페미니스트에게 거부감을 안겼는데, 그들은 드래그와 크로스 드레싱, 공개적인 게이 섹스, 게이 남성의 나교, 게이 남성의 남성성, 게이 가죽, 게이 주먹 섹스, 게이 파트너 물색 그리고 게이 남성들이 한 몯느 것을 무자비하게 반대했다. 나는 이 모든 것이 왜 끔찍하고 반 페미니즘적인지에 대한 흔한 견해를 받아들일 수 없었으며, 종종 이것을 호모포비아의 재구성된 표현이라 생각했다.
4부 퀴어 페미니즘
8장 퀴어 페미니즘에 대한 기록
퀴어 이론과 페미니즘 이론의 결합
내가 퀴어 페미니즘이라고 부르는 것은 젠더, 섹스, 섹슈얼리티에 대한 퀴어한 개념을 페미니즘 이론의 중요한 주제에 단순히 적용하는 것이고, 동시에 젠더, 섹스, 섹슈얼리티라는 페미니즘의 개념을 퀴어 이론의 중요한 주제에 적용하는 것이다. 퀴어 이론은 섹스와 섹슈얼리티에 중점을 둔다. 페니즘 이론은 섹스와 젠더에 중심을 둔다. 퀴어 이론과 페미니즘 이론의 결합의 분명한 결과는 페미니즘 이론의 맥락에서는 퀴어적 관점으로 인해 섹슈얼리티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고, 퀴어 이론의 매락에서는 페미니즘적 관점으로 인해 전더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라는 점이다.
퀴어 페니즘에서의 퀴어
일부 페미니즘에 레즈비언 여성, 게이 남서, 양성애자, 트랜스젠더에 대한 편견이 존재한다는 증거가 있다. 섹슈얼리티에 방점을 둔 퀴어 페미니즘의 명백한 강조는 그러한 문제를 예방하는 데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페미니즘과 퀴어 이론의 두 가지 형태가 제공하는 지배 논리에 대한 비판은 인종주의, 계급주의 및 기타 억압의 표현을 점거말 것을 약속한다. 포스트 페미니즘은 페미니즘적 표현이라는 허울로 가장한 채 선택, 특히 소비자의 선택을 촉진함으로써 주류 문화를 강화한다. 이때 퀴어 페미니즘은 비판적 관점으로서의 페미니즘이 계속 발전하는 방향으로 이어지는 길을 제시할 수 있다.
퀴어 페미니즘에서의 페미니즘
퀴어 이론을 비롯한 섹슈얼리티 연구에도 여성에 대한 편견의 역사가 있다. 퀴어 페미니즘이 젠더를 분명하게 강조하는 것은 이러한 문제를 예방하기 위한 확실한 전략이다. 퀴어의 경전에도 인종차별주의와 계급주의의 역사가 있다. 다시 한 번, 나는 또 다른 비판적 관점이나 추갖거인 차단의 겹이 이러한 편견의 발생을 걸러내는데 유용할 수 있다고 제안한다. 전략적 본질주의는 공동의 목표와 이해관계를 가진 집단들이 편의와 연합전선을 위해 공개적으로는 그들 자신이 본질적으로 동일하다고 일시적으로 나타내면서, 이와 동시에 진행중이며 덜 대중적인 의견 불일치와의 노쟁에 참여하는 전략이다. 그리고 나는 이 용어를 사용함으로서 페미니즘이라는 개념에 내재된 문제에 관심을 끌 수 있기를 희망한다.
퀴어 페미니즘 실천들
문화 교란은 미디어와 광고에 익숙한 기호와 메시지를 사용히여, 영리한 묘기와 장난을 통해 이 기호들을 보다 진보적이고 비판적인 태도를 전달하는 것으로 바꾸어서 소비주의에 저하아고 기업의 권력에 보복하는 전략을 의미한다. 급진적 치어리딩은 문화 교란과 비슷한데, 익숙한 무언가를 가져와서 이것을 꽤나 색다른 메시지로 전환한다. 급진적 ㅊ치어리딩이란 활동가 그룹인데, 이들은 다양한 사회적, 정치적 원인과 관련된 대중적 시위나 저항에 참여하기 위해 단위를 구성하거나 임시로 모인다. 비밀리에 제작된은 이스트 밴 포르노 집단이 어떻게 생겨났는지를 기록하고 그 과정을 시간 순으로 보여주는데, 포르노 영화를 제작하는 과정뿐 아니라 페미니스트 모델 집단의 합의를 통해 해당 영화의 배포를 결정하는 과정도 담고 있다. 관습적인 의미에서는 다큐멘터리라고 하기 어렵고, 이스트밴포르노 집단은 사실 통상 포르노그래피라고 할 만한 것을 제작한 적이 없을지도 모른다. 다큐멘터리와 드라마 사이의 가장 기초적인 구분의 안정성에 도전함으로써 이 영화는 친숙한 개념을 퀴어링한다.
9장 우리는 모두 퀴어하다.
연대자라는 말
연대에 정치적 효용성이 있다고 해서 이성애자 연대자들 이라는 개념이 문제적이지 ㅇ낳은 것은 아니다. 이 개념 뿐 아니라 규범적 섹슈얼리티의 헤게모니에 저항하면서 연대를 창출하는 대안적인 틀과 관련된 몇 가지 문제를 개관해보겠다. 여기에서 주장되는 대안 그 자체에 문제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이러한 대안은 기존의 틀이 이미 한계에 이른 상황에서는 유용할 수 있다.
동성애자-이성애자 이분법은 지나치게 단순하다.
동성애자-이성애자 이분법에 포함된 범주즌 배타적이지도 않고 철저하지도 않다. 사람들은 이 이분법의 양쪽에 다 속할 수도 있고,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을 수도 있다. LGBT+와 이성애자는 상호 배타적이지 않다. LGBT+와 이썽얘짜는 모든 가능성을 망라하지 못한다.
동성애자-이성애자 이분법은 이성애자 특권을 강화한다.
이성애자 연대자들은 LGBT+로 정체화한 사람들과 관련된 사안이 자신에게 불편과 위험을 초래한다면 이를 포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상 이 포기할 자유는 이성애자 특권을 정당화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는 이성애자들의 지지를 존중하믕로써 전혀엊ㄱ 이성애자 특권의 또 다른 예를 강화한다. 바로 많은 이성애자 연대자가 자신들의 의견이 LGBT+문제에서 중요하다는 변함없는 믿음을 갖는 것이다.
1. LGBT+ 공동체에 환영받을 것이라는 기대
2.LGBT+ 공동체를 지지하지 않을 자유
3.LGBT+ 공동체가 고마워할 것이라는 기대
4.LGBT+ 공동체를 승인할 특권
연대자에서 공범자로
LGBT+ 공동체 구성원들과 이성애 연대자와의 관계에 내재된 이러한 문제에도 불구하고, 언대자로 정체화하는 사람들의 지지는 매우 유용할 수 있다.
투쟁에서 지지 또는 연대를 제공하는 연대자의 위험성은 공범자의 위험성과 크게 다르다. 우리가 맞서 투쟁할 때, 해방을 향한 투쟁에 함께 연루될 때, 우리는 공범자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