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정과 감각의 경계에서
이 질문은 겉으로 보면 삶의 형태를 묻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조금만 들여다보면, 이건 장소의 문제가 아니라 태도의 문제에 가깝다.
어디에 머물 것인가가 아니라, 지금의 시간을 어떻게 견디고 있는가에 대한 질문이다. 우리는 정착을 안정이라고 부른다.
주소가 있고, 반복되는 동선이 있고, 내일의 풍경이 크게 달라지지 않는 삶.
그 안에서 사람은 불확실성을 덜어내고 예측 가능성을 얻는다. 예측 가능한 삶은 많은 것을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상태를 만든다. 굳이 증명하지 않아도 되고, 매번 선택하지 않아도 되는 자리.
정착은 그렇게 삶의 긴장을 낮춰 준다.
하지만 긴장이 사라진 자리에 항상 평온만 남는 것은 아니다.
익숙해진다는 것은 더 이상 묻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고,
묻지 않는 삶은 어느 순간부터 조금씩 마르기 시작한다.
특별히 불행하지도 않은데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날들이 쌓인다.
문제는 없는데, 이유 없이 답답한 상태.
그때 우리는 안정이라는 말이 때로는 정체를 가리기 위한 다른 이름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느낀다.
반대로 떠돌이의 삶은 늘 불안정의 언어로 설명된다.
정해진 자리가 없고, 관계는 느슨하며, 내일은 늘 오늘과 다를 가능성을 안고 있다.
그래서 떠돌이는 아직 결정되지 않은 상태처럼 보인다.
우리는 떠도는 삶을 쉽게 미완성으로 분류한다.
어른답지 못한 선택, 책임을 유예한 태도, 뿌리 내리지 못한 삶.
정착하지 않은 삶은 언제나 설명을 요구받는다.
하지만 떠돌이는 정말 도망치는 사람일까.
어쩌면 떠돌이는 멈추는 순간 자신이 굳어버릴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한 자리에 오래 머물수록 스스로를 잃는다는 감각에 예민한 사람.
떠도는 삶은 분명 불편하다.
매번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하고, 관계도 다시 시작해야 한다. 대신 그 불편함은 자신이 아직 살아 있다는 감각을 자주 불러온다.
정착이 삶을 낮은 온도로 유지한다면,떠돎은 감각을 식지 않게 만든다. 편안하지는 않지만, 무뎌지지는 않는다.
문제는 이 둘이 언제나 선택의 문제처럼 제시된다는 데 있다.
정착하면 안정될 것 같고, 떠돌면 자유로워질 것 같다는 기대.
하지만 삶은 그렇게 단순하게 작동하지 않는다.
어떤 정착은 사람을 지키고,
어떤 정착은 사람을 잠식한다.
어떤 떠돎은 숨을 틔워 주고,
어떤 떠돎은 또 다른 소모가 된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헷갈린다.
지금 내가 필요한 게 안정인지, 아니면 변화인지.
머물러야 할 시기인지, 떠나야 할 순간인지.
정착한 사람은 떠도는 삶을 상상하고, 떠도는 사람은 정착한 삶을 그린다. 지금 살고 있지 않은 삶이 더 나아 보이는 건,
현재의 방식이 조금 지치기 시작했다는 신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중요한 건 어느 쪽이 더 나은가가 아니다.
정착과 떠돎은 정답과 오답의 관계가 아니다.
그 안에서 내가 나를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가 더 중요하다.
같은 공간에 오래 머물러도 계속 질문하는 사람이 있고,
끊임없이 이동하면서도 아무것도 바꾸지 않는 사람이 있다.
장소는 바뀌어도 태도가 그대로라면 삶은 쉽게 달라지지 않는다.
삶이 흔들리는 순간은 대개 비슷하다.
지금의 상태를 임시라고 부르기 시작할 때.
이건 잠깐일 뿐이라고 말하며 현재를 유예할 때.
정착한 사람은 조금만 더 버티면 괜찮아질 거라 말하고,
떠도는 사람은 다음에 가면 달라질 거라 말한다.
둘 다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을 붙잡고, 지금을 견딘다.
그래서 나는 요즘 이 질문을 조금 다르게 받아들인다.
정착할 것인가, 떠돌 것인가가 아니라 지금의 나는 무엇을 견뎌내고 있는가를 묻는다. 익숙함이 나를 마르게 하고 있는지, 혹은 불안정함이 나를 지나치게 소모시키고 있는지.
그 답에 따라 우리는 잠시 머물기도, 다시 떠나기도 한다.
아마 우리는 끝내 한쪽으로 완전히 결정되지 않을 것이다.
머무는 법을 배우면서도, 떠나는 용기를 동시에 품은 채로
그 사이 어딘가를 계속 오가며 살아갈 것이다.
그리고 그 흔들림 자체가 어쩌면 결코 삶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뚜렷한 증거이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