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을 맡길수록, 선택은 내 손을 떠난다
지금은 21세기, 최첨단 기술의 시대라고들 말한다.
인공지능이 글을 쓰고, 자율주행차가 도로를 달리며, 휴대폰 하나로 웬만한 삶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시대다. 그런데 이 와중에 묘하게도 사람들은 점점 더 무당과 타로, 철학관으로 몰려간다. 그것도 잠깐 유행처럼 스쳐간 게 아니라, 꽤 오래전부터 꾸준히, 그리고 점점 더 대놓고.
누군가는 말한다.
“요즘 사람들 불안해서 그래.”
맞는 말이다.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그 말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하다. 불안한 시대는 예전에도 많았다. 전쟁도 있었고, 가난도 있었고, 내일이 보이지 않던 시절은 수도 없이 반복됐다. 그런데 왜 지금일까. 왜 이렇게까지 사람들이 자신의 운명을 남의 입에 맡기고 싶어 하는 걸까.
사실 나도 그 무리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사람은 아니었다.
인생이 유독 안 풀린다는 명목 하에, 지금까지 철학관은 다섯 번, 점집은 일곱 번, 타로는 세 번 정도 봤다. 굿도 한 번 해봤다. 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나오지만, 당시에는 꽤 진지했다. 물론 어머니나 할머니 세대의 약력에는 한참 못 미치겠지만, 그래도 웬만한 일반 사람들보다는 경험치가 조금 쌓여 있다고 봐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처음엔 다 비슷했다.
“지금 운이 막혀 있다.”
“조상 쪽에서 뭐가 있다.”
“올해는 조심해야 한다.”
말을 듣는 순간에는 고개가 끄덕여진다. 이상하게도 그 말들은 늘 내 현재 상황과 절묘하게 맞아떨어진다. 연애가 안 풀리면 연애운이 막혔다고 하고, 돈이 없으면 재물운이 들어오기 전이라고 말한다. 취업이 안 되면 시기가 아니라고 하고, 인간관계가 꼬이면 주변에 시기가 많다고 한다.
신기한 건, 이 말들이 거의 틀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틀릴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인생이 잘 풀리고 있는 사람은 애초에 그 문을 두드리지 않는다. 이미 불안하고, 이미 답답하고, 이미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전제를 안고 들어간 사람에게는 어떤 말이든 맞아떨어질 수밖에 없다.
여기서 중요한 지점이 하나 있다.
우리는 인간이 어찌할 수 없다고 판단되는 일 앞에서, 형이상적인 무언가에 기댈 수밖에 없는 심리적 편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무당이든, 철학관이든, 타로든, 심지어 일반 심리상담이든 그 원리는 크게 다르지 않다.
좋은 말을 들으면 기분이 좋고,
나쁜 말을 들으면 기분이 나쁘다.
하지만 거기서 끝이 아니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나쁜 말을 들었을 때, 우리는 그 말을 그냥 받아들이지 않는다. 어떻게든 그것을 좋은 쪽으로 바꾸고 싶어진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부터, 상황은 미묘하게 흘러가게 된다.
“그럼 어떻게 하면 나아질 수 있을까요?”
“이걸 피할 방법은 없나요?”
“조금이라도 덜 힘들어질 수는 없을까요?”
이 질문들이 나오기 시작하면, 이미 주도권은 상대에게 넘어간다. 이제부터는 그들이 말하는 방식, 그들의 해석, 그들의 해결책에 따라 이야기가 흘러간다. 추가 상담, 추가 방문, 추가 비용. 말은 늘 비슷하지만, 사람은 점점 더 깊이 들어간다.
예를 들어 이런 식이다.
처음에는 “조심하세요”로 끝날 이야기가,
다음에는 “이걸 풀지 않으면 반복됩니다”가 되고,
그 다음에는 “지금 안 하면 더 커질 수 있어요”가 된다.
이쯤 되면 우리는 이미 합리적인 판단을 하고 있다고 느끼지 않는다. 대신 막연한 두려움과 안도감을 번갈아가며 소비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가장 큰 문제는, 이 구조가 생각보다 강한 중독성을 가진다는 점이다.
한 가지 문제가 해결됐다고 느끼는 순간, 우리는 잠시 안도한다.
그런데 인생은 원래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조금만 지나면 또 다른 문제가 생긴다.
그리고 그때마다,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다시 문을 두드린다.
“지난번에 여기 와서 괜찮아졌으니까.”
“그래도 안 가는 것보단 낫지 않을까.”
“혹시 모르잖아.”
이 패턴이 반복된다.
결국 문제를 해결하는 힘은 점점 바깥으로 빠져나가고, 나는 점점 더 스스로를 믿지 못하게 된다. 선택을 해도 불안하고, 선택을 안 해도 불안하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내 인생의 결정권이 아주 조용히 남의 말 속으로 넘어가 버린다.
이 원리를 깨닫고 나서, 나는 더 이상 그들의 도움을 찾지 않기로 했다.
물론 그들이 모두 사기꾼이라고 말하고 싶은 건 아니다. 그들 나름의 역할과 기능은 분명히 있다. 누군가에게는 위로가 되고, 누군가에게는 숨 쉴 구멍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그 방식이 더 이상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됐다.
이후로 나는 조금 다른 선택을 하게 됐다.
문제가 생기면, 바로 답을 찾으려 하지 않았다.
운명이나 기운 같은 말로 덮으려 하지도 않았다.
대신 한 발짝 물러서서, 상황을 바라보려고 했다.
이게 정말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일인지,
아니면 단지 책임지기 싫어서 그렇게 믿고 싶은 건지.
그러고 나니 신기하게도, 마음이 조금씩 편해졌다.
모든 게 잘 풀려서가 아니라, 적어도 내 선택에 대한 책임을 다시 내가 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쓸데없는 지출도 줄었고, 무엇보다 결정 이후에 스스로를 원망하는 일이 줄어들었다.
앞을 보니 아플 상이요,
뒤를 보니 뒤질 상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이 무서운 이유는, 미래가 정말 그렇게 정해져 있어서가 아니다.
이 말을 믿는 순간, 우리는 지금 여기서 할 수 있는 모든 선택을 내려놓아 버리기 때문이다.
나는 이제 운을 묻기보다, 나를 묻는 쪽을 선택하고 있다.
이게 정답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다만, 적어도 지금의 나는 이전보다 조금 더 단단해졌다고 느낀다. 그 정도면, 나에게는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