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지우지 못한 번호

by 풍운

연락처 목록을 넘기다가 그 이름 앞에서 손이 멈춥니다. 스크롤은 자연스럽게 내려가지만, 그 한 줄은 쉽게 지나쳐지지 않습니다. 전화를 걸 일도 없고, 메시지를 보낼 일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삭제 버튼을 누르지 못한 채 그대로 두고 있습니다. 숫자 몇 개와 이름 석 자일 뿐인데, 그 안에 담긴 시간의 무게는 생각보다 큽니다.

예전에는 그 번호를 누르는 일이 어렵지 않았습니다. 특별한 이유 없이도 전화를 걸었고, 별일이 없어도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지금 뭐 하고 있어요?” “식사는 했나요?” 같은 짧은 문장이 오가던 창이었습니다. 통화 기록에는 몇 분짜리 대화들이 촘촘히 남아 있고, 그 사이에는 웃음과 투정, 의미 없는 침묵도 함께 들어 있습니다. 그때는 이 번호가 언젠가 닿지 않는 번호가 될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이제는 통화 버튼을 눌러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신호음이 울리지 않을 수도 있고, 연결이 되지 않는다는 안내만 돌아올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더욱 누르지 못합니다. 삭제해버리면 정말로 끝이 날 것 같아서, 그렇다고 남겨두는 것이 어떤 변화를 가져오는지도 알 수 없어서 그저 그대로 두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이제는 정리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연락할 수 없는 번호를 붙잡고 있는 것이 오히려 더 힘들지 않겠느냐고. 맞는 말일지도 모릅니다. 화면에서 지운다고 해서 기억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삭제 버튼을 누르는 순간, 돌이킬 수 없는 선을 스스로 긋는 것만 같습니다. 아직은 그 선을 긋지 못하겠습니다.

휴대전화를 바꿀 때도 그 번호는 그대로 옮겨왔습니다. 새 기기에서 연락처를 동기화하던 날, 그 이름이 다시 화면에 떠올랐습니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데도 존재를 분명히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그 순간 이상하게 안도감이 밀려왔습니다. 적어도 이 목록 안에는 여전히 남아 있다는 사실이, 나와 그 시간 사이를 잇는 마지막 끈처럼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가끔은 연락처를 열어 한참을 바라봅니다. 전화를 걸지도, 메시지를 보내지도 않습니다. 그저 그 이름을 눈에 담습니다. 그렇게 바라보고 있으면, 그 사람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는 기분이 듭니다. 현실에서는 더 이상 만날 수 없지만, 이 작은 화면 속에서는 아직 지워지지 않은 존재로 남아 있습니다.

번호는 더 이상 울리지 않습니다. 알림도 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한 줄은 제 하루 어딘가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연락하지 않는다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다른 말이라는 사실을, 저는 그 번호를 통해 배웁니다. 연결은 끊어졌지만, 기억은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어떤 날은 삭제 버튼 근처에서 손가락이 맴돕니다. 지우면 편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칩니다. 그러나 동시에 두려움도 따라옵니다. 혹시 그 이름까지 희미해질까 봐, 그 시간까지 정리되는 것처럼 느껴질까 봐 망설이게 됩니다. 완전히 끝났다는 사실을 스스로 인정하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습니다.

아직 지우지 못한 번호는 미련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기억을 지키는 방식이기도 합니다. 부르지 않으면서도 지우지 않는 선택. 닿을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완전히 닫지 않는 마음. 그 애매한 상태가 지금의 제 솔직한 모습입니다.

언젠가 정말로 아무렇지 않게 지울 수 있는 날이 올지도 모릅니다. 망설임 없이 삭제를 누르고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날이. 그때가 오면 이 번호는 그제야 과거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은 아닙니다. 아직은 그 이름이 이 목록 안에 남아 있어야 할 이유가 제 안에 남아 있습니다.

연락처 목록을 덮으며 생각합니다. 아직 지우지 못한 번호는, 어쩌면 아직 끝내지 못한 인사일지도 모른다고. 건네지 못한 작별의 문장이 그 안에 머물러 있다고.


월, 수,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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