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의 6번째 기일을 맞아서

by 즐거운 사라

아빠가 돌아가신 지 벌써 만 6년이 지난다. 오는 12일이 아빠의 기일이다. 이제 아빠에 대한 생각도 무던하다. 이번 기일에는 언니가 올해 결혼식을 올렸기 때문에 형부도 함께하기로 했다. 기일을 지낸다 해서 제사를 지내거나 겉치레를 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가볍게 납골당을 다녀오면 된다.


나는 종교적인 이유도 있지만, 사실 번거로워서 아빠의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 제사를 지내는 법도 모르고, 별로 그러고 싶지도 않다. 공자의 78대 후손이면서 유교 사상을 실천하지 않고 있다.


그래서 나중에 결혼할 남자는 제사를 안 지내는 사람을 만나야 한다. 내 편에는 우리 아빠 제사도 안 지내는데, 모르는 사람 제사 지낼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같은 종교인 또는 제사를 생략하는 집안을 만나야 한다. 나는 제사에 관해 타협할 의지가 전혀 없으니까 말이다.


제사를 안 지내기 때문에 아빠 기일이나 생일은 심심하게 보내긴 하다. 지난 명절에도 어쩌다 보니 납골당에 가지 않았다. 사는 도시에 납골당이 있어서, 가까우니 더 잘 안 찾게 된다.


그래도 이번에는 납골당에 모셔진 납골함도 닦아주고 해야겠다. 사진도 더 큰 거로 바꾸고 싶지만, 납골당 관리인이 만류로 작은 사진을 두었다. 아빠가 돌아가시기 얼마 전에 아빠와 언니와 나 셋이 찍은 사진이다. 아빠 사진이 많이 없다. 커서 찍은 사진은 더더욱 없다. 아빠 살아생전에 공원이나 산에 같이 오르면서 사진을 남길 걸……. 뒤늦은 후회를 한다.


이따금 아빠가 살아계셨다면 어땠을까, 생각해본다. 여전히 성격은 고약하실 거 같다. 그리고 가끔은 나와 큰소리 내며 싸우기도 할 거 같다. 그래도 어릴 때보다 아빠를 더욱 이해하고, 큰소리는 참게 됐을 텐데, 싶다.


그래도 내가 기자로 일하는 것과 하고 싶었던 성 칼럼니스트로 활동하는 모습을 보셨을 수 있었을 텐데. 그리고 얼마 전 결혼한 언니가 가정을 이루는 모습도 볼 수 있었을 텐데, 아쉽다.


내가 너무 어릴 때 돌아가셨다. 더 나이 들어서 가셨다면 장례식 더 많은 사람이 찾아오고, 화환도 화려했을 텐데……. 아빠의 화려한 결말을 만들어주지 못한 거 같아 안타깝다.


branch-1226873_1920.jpg

아빠가 떠나신 날


오늘도 아빠가 돌아가신 날이 떠올랐다. 늦게까지 일을 하고 새벽에 쓰러지듯 잠든 사이에 병원에서 엄청나게 많은 전화가 왔었다. 무음인 탓에 문자도, 전화도 일어나서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날은 쉬는 날인 토요일이었다. 늦게 잔 탓도 있고, 쉬는 날이라 더욱 늦잠을 부렸었다. 일어나자마자 핸드폰을 봤는데, 문자로 아빠가 돌아가셨다는 걸 확인했다.


언니가 옆에 있었다. 나는 언니에게 “언니, 아빠 돌아가셨데.”라고 말했다. 언니와 나는 병원에 갈 채비를 하고 집을 나섰다. 우선 둘 다 어두운 옷을 입었다. 그때는 둘 다 차량이 없어서 오산 집에서부터 아주대학교병원까지 택시를 탔다. 대중교통을 이용할 정신은 아니었다. 가을 하늘 높은 날, 날씨가 좋아서인지 도로에는 차가 많았다. 그렇게 오산에서 수원 아주대병원까지 가는 길을 더뎠다.


병원에 도착하고 간호사를 만났다. 간호사는 울먹이며 뭐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사망진단서를 건넸다. 얼굴도 기억 안 나는 간호사지만, 아빠의 죽음 앞에 누군가 울어주는 게 고마웠다. 그리고 나보다 먼저 눈물을 흘리는 간호사의 모습이 당황스럽기도 했다.


그 간호사는 아빠를 처치하다가 임종의 모습을 지켜본 사람이었다. 몇 시간 전에 자기 손에서 떠나보낸 이를 떠올리며 눈물을 흘리는 게 얼마나 인간적인가. 그 간호사 덕분에 아빠의 죽음을 맞이하는 첫 번째 관문은 아름다웠다.


원무과에 내려와서 문제가 생겼다. 병원비를 완납해야 시신을 인계받을 수 있는데, 병원비가 부족했다. 정식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하지도 않은 두 여자의 수중에 무슨 돈이 있었겠는가.


부랴부랴 전화를 돌리고 한두 시간을 기다린 끝에 시신을 인계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다시 오산으로 향하는 시신 운반 차량에 탑승해서 택시에서와 같이 여러 군데 연락을 돌리기 시작했다. 택시에서는 장례 예배를 맡아줄 목사님에게 먼저 연락해 부고를 알렸다. 그리고 오산에 내려가는 길에는 주변 사람들에게 문자를 통해 부고를 알렸다.


장례식장에는 우리밖에 없었다. 마침 주말이어서 2일장을 하기로 했다. 발인은 조금 늦은 시간에 하기로 하고, 주말 동안 조문객을 받기로 했다. 언니와 나 둘이서 상주로 섰기 때문에 부담감이 컸었다.


친가 식구들이 오고, 한두 명씩 조문객 발길이 이어졌다. 그렇게 저녁이 되고, 그렇게 새벽이 되고 금세 시간은 지나갔다.


발인 전 아빠의 시신을 마지막으로 만났다. 말 그대로 차가웠다. 아빠의 시신을 만지는 거조차 겁이 났다. 그렇게 눈물로 인사하며 관으로 보냈다. 모든 게 속절없는 시간이었다.


화장터까지 많은 인원이 따라왔다. 나는 사람에게 구내식당에서 식사를 하라고 식권을 줬다. 화장하는 시간이 지루했다. 그리고 화장된 납골함은 굉장히 뜨거웠다. 떨어뜨릴까 봐 겁이 났다.


다시 납골당으로 돌아가기 전에 따라온 조문객들 대부분을 돌려보냈다. 수원에서 온 손님이 대부분이라 마침 화장터가 수원이어서 ‘고생하셨으니, 얼른 가시라’고 했다.


절반 이상이 떠났지만, 그래도 많은 인원이 납골당까지 함께했다. 그냥 보낼 수 없었다. 납골함을 납골당에 안치한 뒤 나는 사람들에게 아빠에 대해 말했다. 내가 기억하는 아빠에 대해서 울먹이며 말했다. 우리 아빠를 모르는데도 추모하러 온 사람들에 대한 예의 같았다.


다시 장례식장으로 돌아와서 사람들과 인사하고 모두를 돌려보냈다. 집에 가려고 걷는데, 갑자기 다리를 절뚝거리기 시작했다. 그제야 다리가 아픈 게 느껴졌다. 내 가슴 대신 다리가 아픈 거 같았다.


그리고 집에 와서 밥을 먹고, 부의금을 정리했다. 밥도 먹고, 돈도 셀 정도로 정신이 멀쩡했다. 슬픈 것도 모를 만큼 그저 피곤했다.


그 뒤로 잠들었는지 그날의 기억은 없다. 장례식을 치른 뒤 주민센터에 가서 사망신고를 하거나, 한정승인을 받기 위해 가정법원에 가거나 여러 가지로 바빴다. 모든 게 피로했다. 그리고 하나씩 정리해가는 게 괴로웠다.


그리고 벌써 만 6년이 지났다. 아빠는 환갑 전에 돌아가셨다. 아빠의 생일 날짜에 케익을 준비하거나 나 혼자 아빠가 생전 먹고 싶다고 했던 잡채를 만드는 게 전부였다. 그리고 점점 아빠를 기리는 행위가 줄었다. 그렇게 마음도, 행동도 무던해졌다. 아빠의 사망선고서를 받았던 그 순간처럼 냉정을 유지하고 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가을 나라에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