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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현진 Feb 21. 2022

조금 일그러진 모양을 한 위로

웹툰에서 언급 해서 그런지 내가 무라카미 하루키와 에쿠니 가오리의 팬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내가 좋아하는 작가는 황정은, 박솔뫼, 최은영...(님)
웹툰의 소재로 일본 작가들이나 일본 작품들이 많은 건, 내가 깊은 어둠 속에 있을 때 쉼 없이 보아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어둠을 빠져나온 후로도 어쩐지 습관처럼 읽게 되었지만 대부분 실망으로 마무리되곤 한다.
즐겨 읽었지만, 언제부턴가 읽지 않게 된 작가로는 요시모토 바나나.
좋아하는 책은 여전히 몇 권인가 있다.
키친, N.P, 암리타(그러고 보니 암리타는 좋아했었다는 기억은 있는데 책도 없고 내용도 전혀 기억나지 않네)
언제부터 읽지 않게 되었을까, 왕국?
예전에는 좋아하지 않았지만, 다시 읽었을 때 조금 마음이 흔들린 책들도 있다. 도마뱀(누군가가 좋아한다고 하여 다시 읽었다)과 하치의 연인(이 책도 마찬가지)
호불호와 상관없이 요시모토 바나나의 책은 종종 대책 없이 나를 눈물 나게 한다.
시작은 하드보일드 하드럭.
20년 전쯤 친구에게 받은 책인데, 그 책에서 주인공의 언니가 식물인간이 되어 병원에 누워있다.
그 언니의 연인이 병문안을 와 귤을 까는 순간, 귤의 향기와 함께 언니의 웃는 얼굴(이었던가 잘 기억나지 않는다)이 떠올라 순간 주인공이 저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 있는데 나는 처음부터 지금까지도 이 장면이면 이기지 못하고 눈물이 난다.
두 번째는 그 후로 오랜 시간이 흘러, 두부가 죽고 난 후. 키친을 읽는데 눈물이 줄줄 났다.
주인공이 가득 요리를 하는 동안 혼자서 몰래 와인 한 병을 비운 남자 주인공을 보며, 죽은 여자친구의 세일러복을 입고 다니는 히라기를 보며 줄줄 울었다. (쓰다 보니 주인공의 이름은 기억하지 못하고 주인공의 동생 이름은 기억하는 게 너무 나라서 웃음이 난다 )
그리고 세 번째는 며칠 전 출근길 챙긴 N.P
N.P는 원래 좋아했다. 좋아했던 기억이 있어 다시 읽었을 때는 이런 내용이었나 전혀 기억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어떤 내용인지 아주 잘 알고 있다.
오랜만에 읽고 싶어져 챙겨나간 N.P는 그저 매 장면 눈물이 났다.
응, 나는 이 스이라는 인물을 몹시 사랑했고 그 인물이 어떤 행동을 하는지, 어떤 상황에 처하는지 알고 있다. 그래서 어느 페이지를 읽어도 슬펐다.
요시모토 바나나의 글이 완성도가 있냐 없냐 하는 문제를 떠나, 그녀의 글에는 사람의 마음을(특히 아주 약해진 마음을) 흔드는 무언가가 있다.
어딘가 일그러진 모양을 한 등장인물들의 모습이, 도덕적으로든 감정적으로든 옳고 그름을 따진다면 '옳지 않음' 쪽에 가깝다고(할까 단호하게 옳지 않다고 할까) 할 수 있는 등장인물들이 흔들리고 비난받고 일그러진 모습으로 그렇지만 또 사랑받고 위로받고 분명히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나도 무엇이든 괜찮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그(녀)들도 이제 그만 혼란을 벗어나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그(녀)들은 행복하지 않더라도 여전히 혼란스럽더라도 여전히 꿋꿋하게 살아갈 것이다.
작가 자신의 에세이에서도 몹시 좋아하던 순간이 있다. 그런 것치고는 정확히 기억하지 못하지만(뭐든 정확히 기억하지 못하는 게 특기인 사람입니다) 전 애인(인지 전 애인의 가족인지)의 사망 소식에 지금의 애인과 함께 방문해, 전 애인과 사이가 좋을 때 자주 그랬던 것처럼 전 애인의 가족들과 모여 실컷 먹고 마시는 형태로 추모했다는 내용.
전 애인과는, 전 애인의 가족들과 그런 식으로 친밀하게 지냈던 터라 오랜만에 만나 반갑다며 울며 웃으며 실컷 먹고 마셨다는 이야기였는데 그게 무척 좋았다.
나는 작가로의 요시모토 바나나보다는 인간 요시모토 바나나에 애정을 가지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옳고 그름을 떠나 단단하고 허술하고를 떠나 어딘가 일그러진 채로, 그렇지만 꼿꼿이 등을 세운 채로 서 있는 누군가 그 자체가 그 무엇보다 큰 힘이 될 때가 있다.
울고 소리치고 오늘은 한없이 바닥을 쳤어도 내일 아침이면 말끔한 얼굴로 웃고 있는 누군가에게 무섭거나 질리는 게 아니라 도움을 받는 날도.
그녀의 글은 그렇기 때문에 필요한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나에게는 필요했다. 나도 몰랐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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