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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현진 Aug 14. 2024

종말의 서막

연일 이어지는 무더운 날씨에 어찌 지내고 계신가요,

저는 요즘 저를 둘러싼 많은 것들의 유통기한이 끝나버린 듯한 조금 묘한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시작은 건조기였는데요, 처음 이사를 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집 어디에 빨래를 널어도 영원히 마르질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마르지 않은 옷을 입고 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라, 더 이상 짐이 들어가지 않는 구석을 쪼개고 쪼개 수건 여섯 장 정도가 들어가는 작은 건조기를 겨우 들여놓았습니다. 세탁기를 한 번 돌리면 건조기는 내리 세 번 정도는 돌려야 빨래를 모두 말릴 수 있었지만 저는 아무튼 마른 옷을 입을 수 있다는 사실에 만족했습니다. 바로 그 건조기가 얼마 전 내부 통이 돌다가 멈추어 버려 건조기 속 옷들의 건조에 그만 빈부격차가 생기고 말았습니다. 아래에 있는 옷들은 누룽지가 되어 몇 개나 버려야 했지만, 위에 있는 옷들은 영원히 축축한 채로 제 마음을 무겁게 만들었습니다. 그다음은 싱크대였습니다. 미룰 수 있는 데까지 외면해 둔 설거지를 20분에 걸쳐 모두 해치우고 난 뒤 난데없이 싱크대가 막혀버린 것입니다. 저는 어두운 밤, 물이 가득 찬 싱크대 앞에 서서 보이지 않는 수도관의 내부를 상상하며 하염없이 물이 내려가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지막은 의자인데요. 네 개의 다리와 네 개의 바퀴가 달린 작업 방의 의자는 이제 더 이상 저의 무게를 견디기 힘겨웠던 걸까요, 왼쪽 다리의 바퀴 두 개가 예고도 없이 부러져 저는 의자에 앉은 채로 피사의 사탑처럼 한쪽으로 기울고 말았습니다.

무엇보다 저를 기운 빠지게 한 것이 바로 이 의자입니다.

새 의자를 산다 해도, 이 집에는 이 망가진 의자를 치워둘 장소가 없습니다. 대형폐기물로 내놓기에는 엘리베이터도 없는 이 좁은 계단으로 제가 들고 내려가기는 다소 어렵지 않을까 싶은 크기와 무게입니다. 그렇다고 물론 왼쪽으로 상당히 기울어진 채로 앉아서 작업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난감하기가 이를 데 없습니다.

아, 쓰다 보니 기억이 났습니다. 건조기 이전에 선풍기가 있었군요. 갑자기 날개가 빠져서 분해해야 했는데요, 이제 와서 생각하니 이건 그리 큰 일도 아니어서 망가짐의 전초전 정도로 해두죠.

영문도 모른 채 저는 매주 명을 다한 사물들을 맞닥뜨리고 있습니다. 사실은 이 집의 모든 것들이 조용히 사망선고를 기다리고 있는 걸 저만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다음 주에도 또 무언가가 멈추게 될까요, 그것들의 종말을 하나씩 지켜보다가 저의 어떤 시절인가도 막을 내릴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정도로 사소하게 운이 없는 건 아주 큰 행운이 다가오고 있어 그쪽에 모든 운을 써버렸기 때문이 아닐까 억지로 행복회로를 돌려봅니다.

그게 아니라 하더라도 몹시 거대한 하나의 재앙이 다가오는 걸 운들이 최선을 다해 제 몸을 부수어 그보다 작은 여러 개의 재앙으로 모습을 드러낸 거라 믿습니다.

주위의 많은 것들이 하나씩 멈추고 있다고 하여 저마저도 가만히 멈춰있을 수 없으니까요, 무엇이 어찌 되었든 이 시간도 지나가겠죠. 결국 시간은 흘러가고 모든 것은 빠르게 과거가 되어가니까요.

그대에게는 부디 별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운이 나쁜 건 한 사람으로 족하니까요.

다음에는 내게 찾아온(올) 행운을 즐겁게 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모든 것이 망가지고 있는 원더랜드에서 의자 다리 밑에 책과 노트를 잔뜩 끼운 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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