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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꼬맹이여행자 Mar 06. 2019

새빨간 빈디

#인도, 자이살메르 : 먼지가 잔뜩 낀 것은 내 마음인지도 몰라

유독 잔상이 짙게 남는 순간들이 있다.

적지 않은 시간이 흘렀어도 여전히 또렷하게 맺혀 있는 기억들.


영문은 알 수 없다. 네가 건네던 작은 물체가 하필이면 내 심장과 같은 색이라서거나, 사막보다 더 건조한 마지막 말에 갈증을 느껴서일지도. 


골목마다 마주하는 풍경이 참 아름다운 자이살메르


사막 위에 흙으로 만든 집들이 늘어서 있다. 드디어 황금빛 도시라 불리는 자이살메르에 도착했다. 한 달하고도 보름을 더 여행한 인도 여행의 막바지다. 


인도라는 나라를 오래도록 기억할 수 있게 작은 기념품을 사고 싶었다. 시장 골목을 어슬렁거리며 둘러보고 있는데 갑자기 한 남자가 다가온다. 어디서 왔냐는 둥, 이름이 뭐냐는 둥 시답잖은 이야기를 늘어놓으면서. 


“나 빈디*를 사러 가야 해.”


그의 말을 끊었다.

무언의 압박이었다. 할 일이 있으니 더 이상 귀찮게 하지 말라는.


그는 여전히 해맑게 웃으며 저렴한 가격에 살 수 있는 곳을 알고 있으니 따라오라고 손짓한다. 의심의 눈초리를 한껏 치켜세우려다 아직 한낮이니 5분 정도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는 말을 믿어보기로 한다.


* 인도 여성의 이마에 찍는 작은 점을 빈디라고 하며, 현지에서 스티커로 된 것을 팔기도 한다.


인도의 전통 시장


도착한 곳은 여행자들이 다니는 시장 길목의 바로 뒤편이었다. 전통의상인 사리를 온몸에 두른 여인이 손 떼 묻은 빈디 스티커를 잔뜩 모아다 팔고 있었다.


혹시라도 이상한 곳으로 안내할까 봐 내심 긴장이 되었는데 여인의 모습을 보자 안심이 되었다. 덕분에 약간은 얼룩지긴 했지만 빈디를 저렴하게 살 수 있었다.


그는 이제 짜이를 마시러 가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나는 핑계를 대고 숙소로 돌아갔다. 인도 현지인들은 사기꾼으로 넘쳐나기 때문에 엮이지 않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황금빛 도시 자이살메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성벽


다음날 일몰을 보기 위해 마을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성벽에 올랐다. 그곳에는 낮에 만났던 그가 있었다. 우연히 마주친 두 번째 만남에서는 왠지 모를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우리는 해가 저물어가는 것이 잘 보이는 계단에 걸터앉았다. 그는 자이살메르 사막에서 태어나서 이 도시에 친구가 별로 없다고 했다. 시장을 걷다가 환하게 웃는 나를 보고는 친구가 되고 싶은 마음에 말을 걸었다고 한다. 무심했던 어제의 내가 생각나 살짝 머쓱해졌다. 


낯선 문화를 가진 이와 손쉽게 친해지는 방법은 언어를 교환하는 것이다. 우리는 서로에게 한국어와 힌디어를 가르쳐주었다. Happy는 행복이야, Happy는 쿠쉬야, 뭐 이런 것들.

해가 반쯤 가리어졌을 때, 우리는 반 뼘 더 가까워져 있었다.


어두워지기 전에 숙소로 돌아가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아쉬운 기색이 역력한 표정으로 내일은 일정이 어떻게 되냐고 물어온다. 하지만 내일은 자이살메르를 떠나는 날이었다. 그는 기차를 타기 전에 잠깐 만나자고 했다. 마을 근교에 있는 예쁜 호숫가를 보여주고 싶다면서.


분위기에 취해 덥석 알겠다고 했다. 하지만 숙소에 돌아온 뒤 곰곰이 생각해보니 알게 된 지 하루밖에 되지 않은 이를 따라가는 것은 왠지 위험할 것 같았다. 그래서 몸이 좋지 않아 나가지 못할 것 같다고 페이스북 메시지를 보냈다. 확인을 하지 않는 게 신경이 쓰였지만 내가 보이지 않으면 조금 기다리다가 이내 돌아갈 것이라 생각했다.


인도 자이살메르의 기차 플랫폼


다음날, 점심을 든든히 먹고 짐을 챙겨 나왔다. 그런데 약속 장소였던 나무 밑에 한 사람이 서있었다. 메시지를 보내 놓았는데 읽지 못했냐며 능청스럽게 둘러대고는 마지막 인사를 전했다. 죄책감이 슬며시 고개를 들었지만 만난 지 겨우 하루뿐인 상대였다. 그도 개의치 않아할 것이라 생각하며 기차역으로 향하는 릭샤에 올라탔다.


무사히 기차에 탑승한 뒤, 티켓에 표기된 자리를 찾아 짐을 단단히 묶어두었다. 이제 좌석에 앉아 출발하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입구에서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그는 고개를 좌우로 돌리며 누군가를 찾다가, 나를 발견하고 성큼성큼 걸어오기 시작했다.


우리는 창문을 두고 마주했다. 그는 슬그머니 손을 내민다. 손 위에 올려져 있던 것이 내 시야에 들어오는 순간 마음이 시큰거렸다. 새빨간 빈디 세트였다.


“마지막으로 선물을 주고 싶어서…….
그래서 계속 기다렸어. 잘 가.”


그가 건네준 마지막 선물


그는 짧은 말만 남기고 곧바로 뒤돌아서서 성큼성큼 걸어간다. 말은 순식간에 공중으로 흩어졌지만 그 온기는 고스란히 내게 전달된다. 따듯하면서도 차갑고, 촉촉하면서도 건조한.


뭐라도 내뱉어야만 할 것 같았다. 그러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을 것 같았으니까.


“쿠쉬(Happy) 자이살메르! 고마워!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내 입에서 튀어나온 한 마디는 생뚱맞게도 어제 배웠던 힌디어였다.


그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나는 마지막 표정을 끝내 볼 수 없었다.


항상 친절했던 인도 사람들


그 친구가 정말 사기꾼이거나 나쁜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한 대처는 혹시 모를 위험으로부터 나를 지켜낸 현명한 방법이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만약에, 아주 만약에.


순수한 마음으로 나와 친구가 되고 싶었던 한 사람을 몰라보고 인도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색안경을 낀 채 날을 세웠던 것이라면 어떡하지.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인도 기차 안


덜컹덜컹, 기차가 출발한다. 나는 이 곳에 실려 한참을 흔들리다 어딘가에 도착할 것이다. 하지만 그가 건네 온 마음은 놓아둘 곳을 찾지 못했다. 그래서 낡은 때가 잔뜩 묻은 침대칸에 침낭을 깔고 누운 뒤에도 한참을 뒤척여야 했다.


어쩌면 먼지가 잔뜩 낀 것은 이 기차 안이 아니라 내 마음인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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