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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꼬맹이여행자 Mar 20. 2019

세븐 비어는 원 슈니첼

#조지아, 카즈베기 : 장점은 네가 만드는 거야

카즈베기의 상쾌한 아침


조지아의 작은 산골짜기 도시인 카즈베기에 위치한 '코지 코너'. 통나무로 만든 집 위에 빨간 지붕을 얹은 것이 꼭 아늑한 산장 같다. 이 레스토랑은 정숙해 보이는 모양새와는 달리 밤만 되면 가라오케로 변신한다. 식사를 하다가 들썩이는 음악이 들려오면 하나둘씩 자리에서 일어나 춤을 추는 것이다.


같은 게스트하우스에 묵고 있는 독일인 사촌형제 트비아스와 대니얼, 중국에서 온 카라와 새니, 폴란드에서 온 패트릭과 세바스찬. 이 낯선 조합은 시계가 밤 열한 시를 가리키는데도 살아남은 자들이다.


한바탕 춤을 추고 나서 삥 둘러앉아 쉬고 있는데 세바스찬이 이상한 게임을 제안했다.

바로 자기가 할 수 있는 일 중 가장 자신 있는 것을 말하기.

한 마디로 제일 그럴듯한 장점을 말하는 친구가 이기는 거다.


마치 윈도우 배경화면 같은 조지아의 풍경


대니얼이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짓더니 곧바로 손을 든다.


“난 하루에 맥주를 일곱 잔이나 마실 수 있어!”

“독일에서는 맥주 일곱 잔을 마시면 슈니첼* 한 개를 먹은 것과 똑같다고 말해.”


* 고기를 다진 후 빵가루를 입혀 튀겨먹는 독일의 전통 음식.
돈가스와 비슷한 모양새다.


유난히 말수가 적은 트비아스도 거든다. 역시 맥주의 나라 독일에서 온 친구들 아니랄까 봐. 옆에서 지켜본 결과, 오늘 하루 동안 마신 맥주만 해도 다섯 잔은 족히 될 것 같다.


갑자기 모두의 시선이 나에게로 향한다.


“영은, 너는 뭘 잘해?”


가볍게 날아온 질문이 내게는 다른 무게로 다가온다.

나는 뭘 잘하는 걸까.


트빌리시의 시계탑


학창 시절 나 역시 잘한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있었다. 백일장 대회에서 매년 상을 탔고, 긴 손가락 덕분에 피아노 연주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적극적인 성격 탓에 학기 초마다 반장이 되었고, 시험기간마다 벼락치기가 통하는 바람에 머리가 좋다고 여기기도 했다.


그런데 선뜻 내세울 수가 없었다.

여행 도중 감정을 차근차근 정리하며 글을 쓰는 것은 쉽지 않았고, 세월은 나를 악기 하나 다루지 못하는 사람으로 만들었다. 때로는 낯선 사람들이 어색해서 말 한마디도 없이 움츠러져 있기도 했다. 게다가 몇 번이나 확인해놓고서도 버스를 잘 못 타서 기억력을 원망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어쩌면 내가 잘한다고 믿어왔던 것은 학습된 재능이 아니었을까.

무언가 하나는 잘해야 한다는 강박관념 속에서
스스로 만들어낸 환상 혹은 금세 바스러져버리는 신기루 같은 것.
 


조지아의 설산 풍경


확실히 잘하는 게 하나쯤은 있어야 하는 세상이다. 입사 지원서의 자기소개서란에 빽빽이 장점을 채워 넣고 내가 얼마나 뛰어난 인재인지 면접에서 증명해야 할 테니까. 회사에 들어가기 위해 수없이 많은 자기소개서를 썼으면서 이런 질문을 받으면 내세울게 하나도 없다니.


아무런 대답이 없는 내가 답답했는지 대니얼은 다시 ‘건배’를 하자고 제안했다. 독일어로는 ‘Prost’. 술이 들어가자 다시 분위기는 왁자지껄해졌고 그렇게 우리들의 놀이는 싱겁게 끝이 났다.


왼쪽 위부터 트비아스, 나, 새니. 그리고 카라, 대니얼. 조지아 여행의 한 부분을 차지하는 소중한 친구들.


열 두시가 되기 십오 분 전에 숙소로 돌아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로등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깜깜한 길을 되돌아가면서 트비아스와 대니얼은 내게 말했다.


“야, 너 엄청 잘 웃고, 잘 먹잖아. 나는 이게 장점이라고 말하면 그게 바로 장점인 거지. 거창하게 생각하지 마. 장점은 네가 만드는 거야.

“맞아, 영은. 그리고 너라면 우리처럼 하루에 맥주 일곱 잔을 마시는 것도 가능할 것 같아. 너에게는 천부적인 재능이 있다고.”


사진을 찍으려는 내 등 뒤로 나타나 장난을 치는 대니얼



곰곰이 돌이켜보면 내가 생각했던 장점은
나의 시선이 아닌 타인의 시선이 깃들어져 있었다.

누군가 인정해주어야만 하고, 수많은 사람들의 눈에 띄어야만 했다.

그래서 ‘나는 이런 것을 잘하는 사람이야’라고 말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그 잣대는 돌아올 평가가 두려워 스스로 만든 것이었다.

온전한 나만의 시선으로 나를 바라봤을 때, 소소하지만 장점으로 여길 것들이 분명히 있었다.

나는 피곤해도 꾸역꾸역 일어나 만원 전철에 몸을 싣으며 성실하게 살아왔고, 이별의 아픔을 겪는 친구의 고민을 밤새도록 들어주며 위로를 건넬 수 있는 사람이었다. 


조지아 우쉬굴리의 아기자기한 풍경



세븐 비어는 원 슈니첼.


그 날 이후 이 말은 일종의 주문이 되었다.

가끔 내가 보잘것없거나 초라하게 느껴질 때마다 외치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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