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꼬맹이여행자 Mar 27. 2019

너 읊을 줄 아는 시가 뭐야?

#우크라이나, 리비우 : 잊고 살았던 가치

한적한 리비우 거리


새벽 6시, 리비우 기차역에 도착했다. 키예프에서 출발한 야간 기차는 꽤나 안락했다. 물론 침대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거리에 깔려있는 아침 안개는 아직 이 도시가 잠들어있다고 속삭여주는 듯했다. 움직이는 것이라고는 오래된 건물들 사이를 달리는 낡은 트램뿐. 


한껏 예스러운 분위기를 느끼며 텅 빈 거리를 걸어보았다. 순간 1,800년대 리비우에 도착한 것이 아닐까라는 발칙한 상상을 해본다. 마차를 이끄는 말발굽 소리와 19세기 동유럽 특유의 화려한 의상들이 스쳐 지나갔다. 


거리 곳곳마다 있는 리비우의 대표 카페 'Lviv Croissants'


호스텔에 도착해 이른 체크인을 하고 곧바로 거리로 나섰다. 발걸음이 이끄는 대로 걷다가 멈추어선 곳에서 노릿노릿한 빵내음이 흘러나온다. 아직 문을 열지 않은 카페 앞에서 잠시 동안 기다린다. 


첫 손님이 되어보고 싶었다. 한눈에 보아도 이 도시에 처음 도착한 것을 알 수 있을 만큼 호기심에 잔뜩 물든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는 첫 손님. 


마침내 경쾌한 방울 소리가 울리며 문이 활짝 열린다. 잔뜩 부풀어 오른 크루아상들이 저마다 자기를 선택해달라고 뽐내고 있다. 아메리카노와 딸기 생크림 크루아상을 주문하고 테이블 구석에 가서 자리를 잡았다. 


카페에 앉아 한참동안 쳐다보던 문 밖 풍경


문 밖으로 다양한 사람들이 지나간다. 

넥타이가 삐뚤어진 것도 모르고 커피를 들고 바삐 뛰어가는 아저씨, 멋들어진 원피스를 차려입은 채 핸드백을 들고 도도하게 걸어가는 아주머니, 앞머리칼을 휘날리며 자전거를 타고 등교하는 학생들. 

고소한 크루아상 냄새와 커피 내리는 소리만 울려 퍼지는 카페 안쪽과는 사뭇 다른 풍경이다.


저렴한 물가로 오페라를 볼 수 있는 우크라이나


공원에서 체스를 두고 계신 할아버지들


카페를 나와 한참 동안 리비우 시내를 돌아다녔다. 공원에서 체스를 두는 할아버지들 틈에 끼어 아무나 이기라고 응원하기도 하고, 저렴한 우크라이나 물가를 만끽하며 쇼핑을 하고 오페라 극장도 다녀왔다. 오늘 하루도 꽤나 잘 보낸 것 같다. 이제는 저녁을 먹기 위해 호스텔로 돌아왔다.


나를 일제히 바라보던 열두 개의 눈동자


라면을 끓이려고 냄비를 찾고 있는데 갑자기 주방이 시끌시끌해진다. 뒤를 돌아보았더니 열두 개의 눈동자가 나를 향하고 있었다. 여섯 명의 꼬마 친구들에게 어색한 인사를 건넸다. 


그들은 종교행사에 참여하기 위해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다른 지역에서 왔다고 했다. 이젠 내 차례다. 영어도 잘 못하는 아이들에게 내 상황을 설명해봤자 이해하지 못할 것 같았다. 그래서 한국에서 온 대학생이라고 간단하게 소개했다. 그러자 금발 머리의 꼬마 아가씨가 똘망똘망한 눈으로 물어온다.


“우와, 대학교에 다닌다고?
너는 읊을 줄 아는 시가 뭐야?”



잠시 말문이 막혔다. 생전 처음 들어보는 질문이었다.

혹시라도 영어를 잘 못 알아들은 것일까 봐 한 번 더 되물었다.


“시? 시(Poem)를 말하는 게 맞아?”

“그래, 시 말이야! 예를 들면 알렉산드르 푸시킨이나 로미오와 줄리엣을 지은 윌리엄 셰익스피어가 쓴 시 말이야. 세계적인 시인이 아니더라도 한국에서 유명한 시를 들어보고 싶어.”


생각지도 못한 질문 앞에서 도저히 떠오르는 게 없었다.

진지한 표정으로 내 대답만 기다리는 이들을 바라보니 뭐라도 말을 해줘야 할 것 같은데. 



“나는…… 읊을 줄 아는 시가 없는데.”



쭈뼛거리며 솔직하게 털어놓자 아이들의 얼굴에 실망한 기색이 역력하다. 


“너희들은 학교에서 시를 배워?”

“당연하지!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성인이 될 때까지 배워. 시를 외워서 낭송하는 것이 매번 시험으로 나오는걸. 그래서 성인이 되면 누구나 하나쯤은 읊을 줄 아는 시가 있어.”


귀여운 우크라이나의 꼬마 아가씨



바쁘게 돌아가는 요즘 세상에 시라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냐고 생각했다.



하지만 동유럽에서 만난 반짝이는 눈망울의 아이들은 그 가치를 알고 있는 듯했다. 

하나의 시를 품고 살아가는 저들의 마음속은 얼마나 따뜻할까. 


텅 빈 방의 불을 끄면서 마음에 드는 구절이 담긴 시 한 편 정도는 읊을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다짐한다. 책 한 권 읽기 어려울 만큼 고단하게 살아왔던 나의 일상을 돌아보면서. 

이전 05화 세븐 비어는 원 슈니첼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