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기역띠 Jul 29. 2020

당신이 남기고 간 것들

_남는 것들에 대하여

밤엔 자야지. 아니면 공허한 마음을 채우려 번화가를 서성이거거나.

내게 밤은 딱 그 정도의 의미였던 것 같아요.


그런 기분 느낀 적 있어요?


방에 혼자 누워있거나, 혼자 어두운 골목길을 지나갈 때, 또는 텅 빈 사무실에서 혼자 야근할 때, 집에서 냉장고 반찬으로 혼자 대충 끼니를 때울 때, 온몸이 다 아픈데도 연락할 사람 하나 없을 때 등등…


문득 주변을 둘러보니 너무 어두워서, 갑자기 이 상황이, 이 어둠이 너무 무서운 거야. 그래서 질끈 눈을 감아보면 정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절대 어둠이 눈 앞에 펼쳐지는 경험…


더 나빠질 것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더 나빠질 수도 있는 것을 보면 세상은 좌절할 틈을 주지 않으려고 늘 최악을 상비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어요.


한편으론 차라리 눈을 감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하던 적도 있었습니다. 눈을 뜨면 펼쳐질 오늘을 도저히 살아낼 자신이 없었던 적도 많았거든요. 눈을 감으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니까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니까. 오히려 모든 것을 볼 수 있고,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어쨌든 내일을 준비해야겠죠. 주변을 정리하고, 못 다한 업무를 갈무리하고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사무실 입구에 서서 마지막으로 사무실을 한 번 휘- 둘러보고서 불을 탁- 하고 끄면 전등빛에 익숙해진 눈이 순간, 낯선 어둠에 놀라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곤 하죠.


더듬더듬 어둠 속을 헤매고 있자면 처음에는 막막한 기분이 들기도 하지만 이내 눈이 적응해 사물의 형상을 분간하듯, 우리들은 어둠에 서서히 적응하는 속성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최악도 겪다 보면 차악(次惡)으로 느껴지듯 인간은 본능적으로 버티어내는 데 특화된 종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저도 조금씩 조금씩 이 상황에 익숙해져 갔고, 이제는 꽤 윤택한 삶을 살고 있었다는 착각까지 들 정도가 되었습니다. 이 밤도 그럭저럭 견뎌낼 만하다고. 그렇게 믿고 있을 때,


그때 당신을 만났어요.


한 줌 볕도 들지 않던 동굴에 나름, 적응하여 살아가던 미개의 생물은 눈을 질끈 감을 수밖에 별 도리가 없었대요. 당신이 어둠 저편에서 묻혀온 한 줌 볕이 그에게는 너무 밝아 도저히 눈을 뜨고 바로 볼 수 없을 것 같았다고.


그렇게 빛의 존재를 알게 됐어요. 희미한 무채색의 세계가 당신을 알고부터야 비로소 빨간 꽃이 피고, 노란 나비가 날아드는 세계가 된 거죠. 도저히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어요. 눈을 감고서 그저 잠을 청하기엔 당신이, 당신이 보여준 이 세계가 너무나 궁금해 견딜 수가 없었어요. 눈을 감아도 이제는 더이상 어둡지가 않았어요. 밝은 대낮엔 두 눈을 감아도 눈꺼풀 위로 붉은 물이 들곤 하잖아요. 저도 그랬어요. 오히려 빨갛게 두 눈이 충혈되듯 활활 타올랐어요.


그저 그럭저럭 버티면서 살아내던 나의 오늘이, 내일을 기대하기 시작했어요. 빨리 눈을 감기만을 기다리며 살아내던 하루가, 눈을 감으면서도 어서 눈을 뜨고 싶다며 조바심을 내기 시작했어요. 하루하루가 기대와 설렘으로 벅찼어요. 당신은 내게 그런 의미였습니다.


그러나 으레 그렇듯, 인간의 적응 능력은 축복이자, 불행이기도 합니다.

최악이 차악이 되듯 최선도 이내 차선(次善)이 되어 갔습니다.


그리고,

나는 다시 혼자입니다.


익숙함에 소중함을 잊은 나는, 결국 다시 끝없는 동굴 속으로 추락했습니다. 아무런 안전장치 없이 내동댕이쳐진 나는 꽤 오랜 시간을 통증으로 끙끙댔어요. 떨어질 때의 충격 탓인지 동굴 속 바닥은 예전보다 좀 더 깊이 패인 듯싶기도 했죠.


이 모든 일은 당신의 소중함을 간과했던, 대가도 없이 과분한 빛을 탐했던 나의 과오이기에 도무지 억울한 마음은 들지 않았지만, 다만, 다만 나에게는 몇 가지 궁금증이 생겼습니다.


대체 이 동굴 속은 왜 예전처럼 어둡지 않은 건지.

대체 왜 눈을 감아도 태고처럼 어둡지 않은 건지.


이미 당신은 내 곁에 없는데 왜 아직도 꽃은 아직 빨갛고 하늘은 파란 것인지.

내 눈엔 왜 아직도 당신이 알려준 세상이 이리도 선명한 분홍빛으로 남아 있는지.


당신이 너무 보고 싶어요. 답이라도 주고 가라는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빌어서라도, 당신이 너무 그립습니다. 눈을 감으면 그날의 추억들이 그날보다도 선명하게 명멸하는데 눈을 뜨면 세상은… 또 다시 끝없는 어둠입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일인칭 관찰자 되어 보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