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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비령 Oct 12. 2022

아날로그적 즐거움, 종이책 읽기

  책이 주는 고유한 향기에 대해 생각해 보려한다.

  우리는 왜 책을 사랑하는 걸까? 나의 경우에 책 한 권을 사랑한다기보다는 책들이 무리지어 있는 '책이 가득한 모든 공간'에서 행복을 느꼈던 것 같다. 학교 도서관, 헌 책 방, 북카페, 북스테이 숙소, 작은 도서관, 버스 도서관, 어느 로맨틱한 작은 동네 카페 어귀의 책 진열 코너, 파주 출판 도시의 진지향과 같은 북스테이 숙소들, 해외 여행 시 마주친 작가의 집이나 어린이 도서관 등등. 

  살면서 많은 고비를 겪었고, 그때마다 한없이 바닥에 가라앉을 만큼 우울했지만, 그 모든 순간에 나와 함께 해준 것은 단연코 책이었다고 할 수 있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사람과 대화하는 것보다 책을 파고들어 책 속에서 해답을 찾는 편이 훨씬 편했다. 누군가는 재수없다고 욕할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그게 진실인 걸. 

'책만 보는 바보'라고 놀림받는다면 영광스럽겠다. ㅎㅎ 


각설하고, 책을 사랑하게 된 몇 가지 기억나는 장면들에 대해 떠올려 보려 한다. 


소싯적에 꿈많던 여중생이던 시절의 필자는 도서부원이었다.

당시의 내 눈에는 학교 도서관이 대학 도서관보다도 넓어보였고, 그 안에 있는 책들을 '관리'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는 것이 내심 자랑스러웠었다. 헌 책을 노끈으로 묶어 한 켠에 치워놓고, 새 책에 바코드를 붙이는 작업과 스티커 작업을 일일이 한 뒤에, 십진분류표 대로 책을 가지런히 정리하는 일이 그렇게도 재미가 있었다.

학기마다 신착 도서가 수레에 실려 도착하는 날이면, 크리스마스 선물을 한 아름 안고 온 산타할아버지처럼 반가웠었다. 이번에 도착한 책은 어떤 책일까, 제일 먼저 보고싶었고, 그것들을 손에 쥘 때면 설렘이 가득했던 기억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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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신입생 시절에는 '폐가실'이라는 독특한 공간을 발견하였다. 국어학 전공수업을 들을 때면-특히 중세국어 파트에서- 고문헌을 봐야할 경우가 종종 생겼었다. 도서관 컴퓨터로 검색을 해보면 내가 찾는 책은 꼭 '폐가실'이라는 곳에 위치해 있어서, 작은 메모지 같은 종이에 도서분류 번호표를 적어서 사서 직원이 찾아주는 대로 앉아서 기다려야만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다. 직접 서가에 가보지는 못했지만, 내가 찾는 책을 어딘가에서 뚝딱 찾아주는 직원이 한없이 믿음직해 보였고, 그렇게 어렵사리 받은 책은 함부로 할 수가 없었었다. 고이고이 모셔두다가 반납을 하고나면 그렇게 아쉬울 수가 없었다. 그 책이 폐가실 어딘가에 꽂혀서 또 다른 독자를 찾을 때까지 혼자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상상에 무언가 신비롭기까지 했다.



책과 관련된 또 하나의 추억. 그것은 바로 종로와 신림동 고시촌 안에 있던 '헌책방들'에 있었다. 내가 헌책방을 찾은 것은 딱히 필요한 전공서적이 있어서라기보다는 우연히 종로 거리 어딘가를 지나가다가, 책들이 가득 쌓인 보물숲 같은 공간을 그냥 지나칠 수 없어서, 구경을 하러 들어간 데서 시작된다. 

매일같이 반복되는 지루한 일상에 대학 시절도 별 것 없구나라는 실망감에 휩싸일 때쯤, 헌책방에 아무렇지 않게 쭈그려 앉아 고요히 책을 읽는 선배님들의 모습을 본 순간, 이곳이 낭만이구나 싶었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헌책방에 있는 책들은 몇 가지 종류로 나뉜다.

첫째는 베스트셀러들로서 누구나 하나쯤은 집에 있을 법한 우리가 익히 아는 그런 인기서적들이다. 오히려 이런 책들은 헌책방에서가 아니라 어디에서든 구할 수 있기에 흥미가 없었다.

둘째는 전공 서적들로서 두껍고 어렵고 비싸지만 학기가 종료되면 그다지 쓸모가 없어서 가격이 현격히 떨어지는 책들이었다. 주머니가 가벼운 유학생입장에서는 꼭 필요한 책들이었다.

셋째는 인기가 없어서 그 판본수가 적어 헌책방으로 팔려온 책들로서, 많은 경우 정말로 재미없는 책인 경우도 있지만, 또 드물게는 아주 희귀하고 흥미로운 책들이 이 부류에 많았다. 

넷째는 만화나 잡지 등으로 시절을 타는 책으로 한 시대가 지나고나면 급격히 가치가 떨어져 1000원 정도면 살 수 있는 헌책방의 시리즈물들이었다. 이런 경우 시리즈를 새책 한 권 값에도 건질 수 있어서, 도서대여점에 가는 것보다 저렴한 경우도 있었다. 나는 이 케이스도 좋아해서, 만화책을 한 질씩 산 적도 종종 있었다. 


생각해보면, 헌책방에서 보냈던 시간들은 주머니가 가벼웠던 시절의 최고의 낭만이었고, 그곳에서 찾은 책들은 단순한 종이묶음집이 아니라, 추억의 보따리였다. 좋아하던 여류 작가의 유명하지 않은 작품들도 찾아 읽을 수 있었고, 부담없이 이런 저런 책을 뒤적여보고, 책을 소유하는 욕구도 채울 수 있었으며, 책들이 공기처럼 흔한 그곳에서 한없이 늘어지게 책을 보아도 누구 하나 뭐라는 사람이 없어서 자유로웠다. 



이렇게 책과 관련된 과거의 기억들을 떠올려 보니, 그 시절들이 아련하게 그리워진다.

그저 천원짜리 책 한 권을 사고도 온 세상을 얻은 것처럼 단순한 행복을 얻을 수 있었던 나의 이십대.


전자책이 흔해진 시대지만 여전히 종이책이 그리워지는 이유이다.

좋은 종이로 인쇄된 책을 만지는 손끝의 촉감, 그리고 책에서 나는 고유한 그 향기.

헌책들이 켜켜이 쌓여있거나, 머리 위 높은 곳까지 가득찬 대학 도서관 안의 풍경을 볼 때 느낄 수 있는 그 충만감은 어떤 맛있는 음식을 먹은 것보다 배가 부른 느낌이었다. 먹어도 먹어도 채워지지 않는 식욕이 있다면, 책이 가득한 공간에 가서 지식이나 감동을 채워보는 건 어떨까. 의외로 독서는 최고의 다이어트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책이 있어 행복한 유년이었고, 앞으로도 늙어 꼬부랑 할머니가 될 때까지, 책을 손에서 놓지 않고 살고 싶다. 아날로그적 감성이 가득한 작은 서점하나 꾸려서, 예쁜 식탁보와 아기자기한 인형들, 멋스런 영국풍 찻잔에 달콤한 디저트가 있는 북카페 하나 차리고 싶다. 그렇게 고요히 늙어간다면 더한 행복이 없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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