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하루는 4시 30분에 시작된다.’라는 책이 있다. ‘나를 주도하는 시간, 여유를 찾아 주는 시간,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시간’. 그 시간이 바로 아침을 여는 이른 새벽의 의미라는 것이다. 이 책을 읽고 새벽이 주는 희망과 열정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누구나 이른 새벽에 다른 사람보다 먼저 하루를 열다 보면 삶에 여백의 공간이 생기고, 이 여백을 활용해 삶을 더욱 알차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보통 새벽을 여는 사람들은 부지런하고 근면 성실한 경우가 많다. 학교 갈 아이들의 아침 식사를 준비하는 엄마, 조금이라도 더 공부할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일찍 일어나 자기 계발을 하는 직장인들, 고객들에게 빠른 배송으로 생활의 편리를 추구하게 하는 택배 기사님들, 아침 조깅이나 수영을 하기 위해 일찍 하루를 시작하는 분들..등.
그러나 책에서 말하는 새벽이 주는 희망이나 열정의 긍정적인 의미와는 달리, 내가 경험한 새벽은 암흑과 두려움의 시간이었다. 이른 새벽은 불면증에 시달리는 시간이었고, 잠 못 이룬 수 많은 새벽들은 나를 불안하게 했다. ‘얼른 잠들어야 하는데… 아무 생각을 하고 싶지 않다.’ 자세를 몇 번이나 고쳐 눕고 가습기를 켜고, 조명의 밝기를 조절해보고, 화장실을 들락날락. 물을 마셨다가 소파에 앉아도 보았다가 읽었던 책들을 들춰보다가, 뜬금없이 설거지를 하거나 손빨래를 하는 등등.
불면증에 시달리면서도 잠 못 이룬 그 시간들을 생산적으로 활용하기 보다는 미래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과 스스로에 대한 자책들로 더욱 고민의 깊이가 깊어졌다. 불면증은 우울증과도 가까운 증상이어서 잠을 못 잘 만큼 쓸 데 없는 생각이 많아지니, 더 우울해지고 가라앉는 기분이 심화되며 악순환이 이어졌다. 심할 때는 하루에 3,4시간씩만 자고 아침이면 출근을 해야하는 날들이 계속 이어졌다. 충분한 숙면을 취하지 못했으니, 무거운 몸을 이끌고 하루 일과를 유지하는 게 힘들기도 했다. 그렇다고 해야할 일들을 안 할 수도 없기에, 피곤한 몸을 이끌고 하루를 꾸역꾸역 버텨냈다고 밖에는 말할 수 없겠다.
한창 잠 못 들던 시기에는 뜬 눈으로 새벽 3시까지 아무 것도 안하고 천장만 바라봤던 적도 있었다. ‘곧 잠이 오겠지. 이제는 잘 수 있을 거야. 대체 왜 못 자는 거야. 이러다 밤 새겠네.’ 이런 생각들을 하면서 말이다.
그러다 지쳐서 설핏 잠이 들어도 새벽 6시면 눈이 떠져서 더 자고 싶어도 잠이 안 오는 기이한 나날들이 이어지기도 했다. 피곤에 지치면 몸이 저절로 반응해서 잠이 올 법도 한데, 참으로 이상하게도 지친 몸보다 지친 마음이 내 잠의 세계를 조종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불면증을 겪어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모두가 잠든 고요한 새벽 시간에 잠 못 이루고 뒤척이는 사람들의 고독함과 답답함을. 그런 순간들이 몇 달째 이어지면서 나는 나를 잠 못 들게 하는 내면의 깊은 슬픔을 달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안에 깊이 자리잡은 어떤 우물 속 자아가, 우물 밖의 자아에게 계속해서 외침을 보냈던 것은 아니었을까. ‘자지 말고, 내 이야기를 들어줘. 이제는 나를 돌아봐 줘.’라고.
제대로 된 숙면을 취하고 쉽게 잠 들고 싶어서 내가 선택한 것은 뜨개질이나 설거지 등 단순한 일들이었다. 형광 노랑이나 핑크 색 등 밝은 색으로 수세미를 뜨거나, 아이에게 줄 장갑이나 목도리, 소파에 얹을 코바늘 방석이나 린넨이나 굵은 면사로 가방이나 지갑 등 작은 소품들을 뜨고 또 떴다. 딱히 무언가 필요에 의해 만들었다기 보다는 그저 잠 못 드는 시간들을 채울 무언가가 필요해서였다.
밤 늦은 시간에는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는 것도 부담스러워서 피했다. 될 수 있으면 아무 생각을 하지 않고.
할 수 있는 일들을 하고 싶었다. 생각을 하지 않고 손을 움직이다 보면 쓸 데 없는 부정적인 잡념들이 하얗게 지워질 것만 같았다. 머릿 속 상념들을 리셋하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잠 들 용기가 필요했다.
때로는 정말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여명이 올 때까지 창 밖을 바라보는 날도 있었다. 계절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해가 떠오르는 시간에 깨어있을 때, 불면증이 고마운 순간이기도 했다.
생각을 하지 않기로 결심한 새벽을 보내면서, 걱정과 상념 속에서 잠 못 드는 날들이 줄어들었다. 어떤 날은 해가 뜨는 것을 보지 못한 채 늦잠을 자기도 했고, 문득문득 깨어 화장실을 버릇처럼 드나들던 버릇도 차차 없어지기 시작했다.
불과 몇 년 전 일이지만 어느 시점부터 나의 불면증이 사라졌는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나를 잠 못 들게 하던 깊은 우물 속 내면의 자아의 목소리가 많이 줄어들었다는 것이다. 잠 못 드는 무수한 새벽들을 보내면서 나는 새벽이 주는 고독함이 진정한 내면의 자아와 마주칠 수 있었던 고마운 시간이었음을 알겠다. 아무도 방해할 수 없는 나만의 시간, 고요히 떠오르는 여명을 바라보며 인생을 정비할 수 있었던 주체적 시간.
나의 하루는 고요한 새벽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뜬 눈으로 지샌 불면의 나날들은 힘들었던 과거의 시간들을 떠나 보내고 새로운 아침을 맞이하라고 애정 어린 잔소리를 하는 엄마같은 시간이었다. 이제 새벽은 고문의 시간이 아니라, 희망의 시간이다. 이 소중한 시간들을 어떤 색으로 채우면 좋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