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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비령 Dec 18. 2022

강추위도 거뜬하게 이기는 볼 빨간 우리들

요 며칠 날씨가 심상치 않다.

하늘은 청명하고 맑다가도, 온통 탁한 회색빛으로 물들었다가

스티로폼처럼 뭉쳐진 채로 세차게 내리는 눈발이 하루 종일 계속되기도 하고

그친 눈 사이로 분주하게 움직이는 구름들이

평화로운 겨울날들은 어서 가라고 몰아붙이는 느낌이다.


눈이 가득한 한 겨울의 풍경을 떠올려보면

그 차가운 온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따뜻한 이불 같은 기운이 느껴졌었는데.

요 며칠 한국의 날씨는 정말로 동장군이 심술을 부리는 듯

많은 이들을 추위 속에서 힘들 게 하는 것 같다.



어제 저녁에는 오랜만에 서울 한복판에 요즘 핫하다는 합정동 일대를 방문했다.

내가 한창 대학생이던 2000년대 초반에는 홍대 뒷골목이나 이태원 일대가 핫했었는데

토요일 밤, 강추위에도 불구하고 젊은 이들의 열기로 가득 찬 합정역 거리를 거닐면서

'젊음은 여기서 흐르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더라.


영하 15도 따위의 강추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오히려 두 손 꼭 잡은 채로 거리를 활보하는 연인들이나,

추운 겨울밤도 하루도 놓칠 수 없다는 듯이,

친구들 지인들과의 약속을 기다리며 종종걸음으로

볼 빨개진 채 수다를 떠는 젊은 아가씨들, 청년들.


그 사이에 불빛 네온사인들은 화려하게 빛나고

'오늘 와인 한 잔' 간판 앞에서는 나도 모르게 와인 잔을 손에 쥐었던

과거의 내 모습이 오버랩되면서 추억여행을 온 기분도 들었다.



그러고 보면

날씨에 예민해지기 시작한 건 아이를 낳은 이후부터였던 것 같다.

그 전에는 비가 오든, 눈이 오든, 자외선이 강하든, 황사가 덮치든.

날씨에 개의치 않고 예정된 일정은 모두 소화했었고,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먼 길을 달려가는 것도 번거롭게 여기지 않았었다.


참으로 소심하고 어리석게도,

요즘은 어떤 공간에 가면, '내가 이 공간에 있어도 되나?' 이런 생각도 가끔 든다.


아니 뭐. 애 엄마가 어때서.

그냥 나도 오로지 나인채로 다시 젊음의 열기 속에서

강추위 따위 아랑곳하지 않고

아무 생각, 고민도, 내일도 없는 듯이

당장 지금만 살아있는 듯이

그렇게 살고 싶다.


그리고 지하철 안에서 마주친 낯선 이들의

숨겨진 삶의 나날들을 상상해 본다.

토요일 밤 10시.

합정역 지하철역에서 만난 다양한 사람들의 히든 라이프.

강추위도 있게 할,

'당신의 지금 이 순간을 살아 숨 쉬게 하는 무언가가 무엇인가요?'

아니 굳이 의미를 찾지 않아도 좋아요.

우리 이렇게 지금 이 순간들을, 볼 빨개진 채로 즐기며 살자고요!



<선물로 시 한 편^^>



- 윤동주


지난밤에

눈이 소오복이 왔네.


지붕이랑

길이랑 밭이랑

추워한다고

덮어주는 이불인가 봐.


그러기에

추운 겨울에만 내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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