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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치 Oct 08. 2021

선택할 수 없는 삶

무거운 어깨

비가 많이 온다.

비도 기분이 있다면, 오늘의 비는 꽤 우울해 보인다.

꼭 내 기분 같다.


오랜만에 출근하는 날..

종종 일이 있으면 출근하고는 했지만, 아이 등교 일과 겹치는 날이라 전 날부터 세심하게 준비했다.


아무리 기분 좋게 재워도 다음 날이면 90% 이상 기분이 안 좋기에 푹 자도록 깨끗하게 목욕시키고 기분 좋은 향기가 나는 비싼 헤어 오일로 마무리해서 드라이도 해주었으며 뽀송한 잠옷을 입히고, 없는 연기력을 끌어올려 실감 나게 해리포터를 읽어 정말 기분 좋게 재웠다. (마법 주문은 꼭 아이에게 읽도록 시킨다. 그럼 정말 진지하게 '엑스펙토 페트로놈!'을 외치는 게 꽤 귀엽..)


완벽한 밤이었음에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리고, 엄마가 없으면 할머니가 엄마라는 것과 내일 기분 좋게 학교 가기를 손가락 걸고 약속도 했었다.


아침 8시가 되기 전, 가방과 노트북을 들고 출근하려는 찰나..

엄마(외할머니)가 아이 방 앞에서 아이를 깨우고 있다. 


8시 전에 깨우면 안 되는 것을 그렇게 학습했음에도..

성격 급한 엄마는 아이가 제일 싫어하는 방법으로 아이를 깨우고 있다. 

(문 앞에서 부정적 표현으로 잔소리하기: 8시인데 안 일어날 거야? 학교 안 갈 거야?)


불안함이 엄습해왔다. 

하지만, 나도 하루는 좀 편해보자. 

밥벌이를 위해 나는 나간다.

엄마 파이팅!




8시 14분

엄마의 카톡이 온다.

"꼬마화가 문 잠그고 안 나온다"


그 짧은 시간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아이에게 전화를 해본다.


"외할머니가 문을 강제로 열라고 했어. 젓가락 같은 걸로 막 쑤셨어" 


강제로 문을 열만큼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난 것 같지는 않지만.. 그 상황에 없었으니 엄마를 탓할 수만도 아이를 뭐라 할 수만도 없다. 그저 답답할 뿐..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아이의 얘기를 잘 들어주고, 엄마가 할머니께 잘 얘기할 테니 얼른 준비해서 학교 가자라고 설득하는 것과 화내지 않고 아이를 학교에 골인시킬 수 있게 엄마의 비위를 맞추는 것 밖에는 없었다.

아.. 선생님께 상황 보고도 해야 하고..


세 사람과 계속 연락하고 조율하느라 50여분의 출근길에서 봤던 사람, 풍경.. 하나도 기억이 나질 않는다.


10시 12분

계속되는 미팅에 잠시 짬을 내어 엄마에게 보내본 카톡

"꼬마화가 학교 갔어요?"

"갔어"

"고생했어요"





아침에 어떤 상황이었을지 안 봐도 상상이 간다.

시간이 흐를수록 아이의 고집과 떼의 강도가 세진다.

외할머니는 아이의 짜증의 기미만 보여도 심한 알러지 반응처럼 날카롭게 대응한다.


엄마는 나에게, 딸도 나에게 짧지만 속상한 메시지를 보낸다.

차라리 하루라도 몰랐으면..


아이도 엄마도 미웠다.

집에 들어가니 둘은 또 화해를 했는지 화기애애하다.

8시간여의 장시간 미팅에서도 오랜만에 만난 회사 동료들과의 즐거운 대화 속에서도 나는 지옥이었는데..


그래도 나는 엄마니까..

아이랑 기분 좋게 대화 후 다음 날(오늘) 기분 좋게 학교 가기로 약속 후 책을 읽고 예쁘게 재웠다.


엄마한테도 앙금이 없지 않아 있지만, 엄마도 노후에 무슨 고생인가 싶어 그냥 다 내가 참기로 했다.

좀만 버티면 돼. 

한 36,230일쯤.. 




오늘 아침은 내가 악역을 맡았다.

아무리 친절하게 깨워도 눈 뜨는 순간 마주치는 사람이 타겟이 될 가능성이 높기에.. 오늘은 기분 나쁠 거리가 없었는데 그저 눈앞에 있었단 이유 하나만으로 내가 타겟이 되었다.


타겟이 된 순간 어떤 말도 아이에겐 그저 짜증 나는 잔소리일 뿐인걸 알기에 그냥 악역 했다.

그리고, 엄마랑 한 약속 알지? 오늘은 봐줄게. 하지만 다음엔 여기 쓰여있는 데로 할 거야. (https://brunch.co.kr/@puppy3518/49)


늦었지만 학교에 가는 듯하다.

9시가 넘어서 내려가 볼 수가 없었다.

오늘 미팅만 10개가 있었기 때문.


미팅을 진행하고 의견을 내고 팀원들의 결과물을 리뷰하고 활발하게 토론하다 보면 잠시 다른 세상에 가있는 것 같다. 직장인으로서 당당하고 즐거운 삶이 진짜인가.. 매일 싸우고 고민 속에 사는 게 진짜인가.. 모르겠다.


점심 식사 전 잠시 약국을 다녀오는 길..

집 앞에 내놓아진 재활용 봉투 안에 우리 집 선풍기가 형편없이 분해되어 버려져 있다.


인테리어 생각해 산 노란 선풍기라 같은 걸 다른 집에서 내놓았을 리 없다.


"엄마 선풍기 고장 났어?"

"몰라! 부서져서 버렸어"

"뭐라 하는 게 아니고.. 나한테 AS 되는지 알아보라고 하지. 그냥 버릴 정도로 많이 망가졌어?"

"아 몰라!!"


이건 뭐지..

찝찝함에 밥을 한 술 뜨는데 넘어가질 않는다.


"엄마.. 얼마 전까지 멀쩡하던 게 버려져있으니 물어본 건데 그렇게 반응하니 더 이상한데.. 무슨 일 있었어? 꼬마화가랑 싸울 때 던지기라도 했어?(아이한테 말고 홧김에?)"

"아 몰라! 내가 그런 거까지 하나하나 얘기해야 해? 그냥 걸려서 부러졌고 화가 나서 발로 찼더니 다 부서져버렸어"


결국 밥 먹는 걸 포기하고 내 방으로 올라갔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튼튼한 선풍기가 부서질 정도면 얼마나 세게 찼길래..

그리고, 평소 엄마라면 실수로 선풍기를 망가뜨렸으면 구석에 잘 정리해두고 내가 실수로 이랬으니 AS 알아봐라.. 하셨을 거다.

이건 분명 우발적 충동으로 인한 고의다.


이렇게 폭력적으로 표현할 만큼 엄마에게도 화가 많이 쌓인 거구나




오늘은 앞으로 이래야겠다..라는 다짐 같은 걸 할 기운이 없고 하고 싶지도 않다.

그저 아이는 또 약속을 어겼으며, 엄마는 어른답지 못하게 행동했고, 나는 그 누구도 품어주기 힘든 상태이다.

그동안 노력들이 다 물거품이 된 느낌이다.


내 대부분의 시간을 엄마와 아이를 위해 쓰고, 예쁘고 편한 걸 발견하면 엄마 하나 사드리고 싶고 아이에게 재밌는 걸 발견하면 아이에게 사주고 싶고, 늘 둘을 위해 살았던 것 같은데.. 기운이 쏙 빠진다.


나를 위한 것은..

하루 일과가 끝나고 방구석에 앉아 마시는 저렴한 와인 한잔..


엄마를 위해 우리가 독립하는 것도, 아이를 위해 내가 일을 그만두는 것도 그 어떤 것도 선택할 수 없는 삶을 아쉬워하며 그냥 와인이나 한 잔 하고 자야겠다. (오늘은 해리포터 패스.. 흥)


선택할 수 있는 삶. 

얼마나 멋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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