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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치 Oct 21. 2021

궁지에 몰린 엄마의 한풀이

등교 거부

선생님, 오늘 이러이러해서 아이가 또 늦을 것 같습니다.

다만 아이가 안 들어가고 버틸 시 따로 안 챙기시면 좋겠어요.

교실에 안 들어가도 모두 챙겨주시니 아이가 믿는 구석이 있어서 더 버티는 것 같습니다.

스스로 창피함도 느껴보고, 용기를 내서 교실에 들어오는 경험을 할 수 있도록 기다려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이틀 전 등교일, 

아이는 나름 일찍 기분 좋게 집을 나섰으나 8시 59분에 교실에 도착했고, 마침 외부 강사님이 수업하는 날이라 아이들이 다 올 때까지 문을 열어놓는 담임 선생님의 배려와 달리, 교실문은 닫혀있었고 아이는 교실에 들어갈 수 없었다. 보통 아이들이면 늦어도 들어갔겠지만 우리 아이가 보통 아이 었다면 내가 이렇게 글을 쓸 필요가 없었겠지.


아이가 교실에 들어가지 못하고 복도에 있자, 늘 그렇듯이 상담 선생님, 담임 선생님과 교감 선생님께서 번갈아가며 아이를 돌보며 설득하셨으나 아이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아이가 초등학교 입학 후 선생님들에게 우리 아이가 얼마나 답답하게 했는지 전화를 받는 게 익숙하지만,  그래도 4학년 선생님은 좀 다르게 느껴졌다. 그 전 선생님들과의 통화는 상담의 옷을 입고 있지만 결국은 아이의 행동을 비난하고 본인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하소연하는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현재 담임 선생님은 진정 아이를 걱정하는 것이 느껴졌다. 이제 아이가 학교에 가는 것을 즐거워하고 마음을 열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 나 혼자만이 아닌 교육 전문가인 선생님과 함께라니 든든했고 올해 정말 아이가 많이 좋아질 거라 기대도 많이 했었다.


그런데 선생님도 그날은 많이 힘드셨나 보다. 평소와 다르게 10분이 넘게 시간 순서대로 아이의 행동에 대해 읊어주셨고, 거기엔 지침과 힘듦이 고스란히 묻어 있었다. 그저 죄스러울 뿐이었다. 집에서는 대부분 밝고 즐겁고 자신만만한 아이가 왜 학교에만 가면 그러는지 나도 답답할 뿐이다.


그런데,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왜 지각하는 아이가 교실에 안 들어오고 버틸 때 달래야 할까?


선생님께선 아이의 안전 때문이라고 하시지만, 학교가 그렇게 위험한 곳일까?

(꼰대 같지만) 우리 때처럼 지각하는 아이가 지각에 대해 자각할 수 있도록 약간의 야단을 치면 안 되는 것일까? 부끄럽다고 못 들어오는 아이를 왜 돌아가며 돌봐주셔야 할까?


시간은 많이 흘렀고, 세상도 많이 변했다.

하지만 나는 내가 학교 다닐 때 지각하면 혼났던 경험이 내 인성과 정서에 안 좋은 영향을 끼쳤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시간을 지키는 게 중요하구나. 약속은 지켜야 하는 것이구나..라는 것이 자연스럽게 깨우쳐 쳤던 긍정적인 경험이었던 것 같다. (물론 심하게 체벌을 당했거나 하진 않아서 이렇게 생각하는 것일 수도 있다.)



아침에 세월아 네월아 느릿느릿 준비하는 아이를 보면 속이 터진다. 그때 정해진 시간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에 대해 얘기하지만, 아이는 그것을 피부로 느끼지 못하는 것 같다. 지각을 했다는 사실은 아이에게 중요하지 않다. 다만, 늦게 교실문을 열었을 때 자신에게 쏟아지는 친구들의 시선이 두려울 뿐이다. 


잠도 덜 깨서 빨리 움직이기 힘든데 빨리 준비해라 종용하는 엄마와 할머니는 적이 되고, 부루퉁해서 학교에 가지만 이미 수업은 시작되었고, 아이는 친구들의 시선이 두려워 계단에 앉아 버틴다. 그러면 담임 선생님이 나오셔서 설득하지만 아이는 고집을 피고, 선생님께서 수업을 하러 가셔야 하니 상담 선생님께서 오셔서 아이를 상담실로 데리고 가신다. 아이는 그렇게 오전을 보내고 점심을 먹고 집에 온다. 이미 교내 유명인사가 된 지 오래다.




물론, 아이가 기분 좋게 일어나 제 시간에 갈 수 있도록 집에서의 노력이 가장 우선이 되어야 한다. 엄마(외할머니)와 나는 그날의 타깃이 되지 않는 한 최선을 다해 아이가 기분 좋게 학교에 갈 수 있도록 노력한다. 핑계일 수도 있겠지만 노력으로도 안 될 때가 있다. 예민한 성향일수록 아침엔 뇌가 비활성 상태라 약간의 자극도 분노로 폭발할 수 있다는 글을 본 적이 있다. 아마 우리 아이도 그에 해당되는 것 같다.


아이가 이유 없이 분노를 폭발할 때는 정말 이를 악물어도 예쁜 말투가 나올 수가 없다. 그냥 어떤 말을 해도 공격 대상이기 때문에 어쩌면 잠시 자리를 피할 때가 더 도움이 될 때가 있다. 그러나 사람은 기다릴 수 있지만 시간은 기다리지 않는다. 아이가 기분이 좀 덜 상한 채 학교를 가게 돼도 이미 수업은 시작되었고, 교실 문을 열기는 너무 부끄러워진다. 이 것이 반복이다.


감히, 아이를 잘 못 키운 엄마지만 공교육에 조금이나마 기대보고 싶다는 희망이 있다.

어쩜 남의 아이에게 저렇게 친절하실 수 있을까? 싶었던 좋은 선생님들이지만 가끔은 따끔하게 야단쳐주면 좋겠다. 복도에서 아이가 잠시 외롭겠지만 스스로 문을 열고 들어올 수 있도록 기다려주셨으면 좋겠다. 그리고 스스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날 아이는 더 성장할 수 있지 않을까?

 7살 때 입학한 나는 작았고, 한 살 어리다 놀림도 받았으며 성격 또한 내성적이었다. 그런 나에게 발표는 너무나 괴로운 것이었다. 얌전히 학교생활을 잘했지만 눈에 띄지도 않고 말을 시키면 배시시 웃거나 울음을 터뜨리는 그런 아이였다. "성격이 내성적이며 스스로 할 일을 잘함, 발표력이 부족함" 이 것이 내가 받던 평가였다.

그러던 3학년 어느 날, 여러 명의 아이들이 앞에 나가 수학 문제를 풀지만 다 틀렸었다. 하지만 나는 답을 알고 있었다. 속으로는 손을 번쩍 들고 문제를 풀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러다 또 다른 친구가 나가 문제를 풀었으나 틀렸고, 나는 이를 악물고 눈을 꼭 감고 손을 들었다. 그리고 앞에 나가 문제를 풀었다. 당시 무섭기로 유명한 선생님이었는데 그런 선생님께서 나를 꼭 안아주셨다. 문제도 맞혔지만 손을 들어 앞에 나가 문제를 푼 용기를 낸 나에게 준 선생님의 칭찬이었다. 

30년도 넘은 기억이 지금까지도 생생하다. 지금도 발표는 무섭지만, 분명 그날의 기억은 나를 한 단계 성장시켜주었다.




아이와 즐거운 주말을 보내고, 전 날 또한 기분 좋게 해리포터를 읽다 둘이 깔깔대고 즐겁게 안아서 재웠더란다. 그런데 아침에 눈빛이 달라진 아이에게 나도 마음이 상했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오늘은 나도 내 마음을 좀 달래주고 싶다. 하소연을 하고 싶다.

그래서 교육자분들이 보시면 기분이 상할 수도 있겠지만.. (평소 그런 글은 쓰지 않지만) 

조금은 엄하게 해 주시면 좋겠다는 희망을 풀어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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