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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치 Feb 20. 2023

#15. 집 놔두고 차에서 뭐 하니?

모녀 차박

발랄하고 싶지만 어른의 품위를 지켜야 하고,

정의롭고 싶지만 밥벌이에 침묵해야 하고,

훌쩍 떠나고 싶지만 엄마와 딸을 챙겨야 하는,

나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바쁜 연령대, 40대 워킹맘이다.


그래도 즐기는 삶을 놓고 싶지 않다. 산과 바다로 부지런히 떠난다.





큰맘 먹고 계획했던 동생과의 첫 캠핑이 폭설과 한파로 취소되고 붕 뜬 주말, 그냥 보내려니 아깝다.

늘 그렇듯이 딸과 "밥전쟁"을 한바탕 치른 터라 기분도 별로다. 멍하니 캠핑 영상을 보다가 안 되겠다, 떠나자! 딸이 추운데 같이 가려나 모르겠지만 물어나 보자.


"엄마랑 내일 차박갈래? 텐트를 안 칠 거라 불편할 거야. 그래도 바닷가로 바람 쐬러 가자. 어때?"

"오! 겁내 좋아"


와우! 까달까달 사춘기 초입 따님이 "겁내"라는 표현까지 써가며 좋다 하니 바로 차박 할 곳을 찾았다. 겨울이라 그런지 거리도 가깝고 바로 바다가 보이는 차박지도 예약이 가능했다.





가볍게 출발

이번엔 진짜 간단하게 가보자. 사랑하는 딸과 탁 트인 바다만 생각하자.


그래서, 따뜻하게 잘 준비만 했다. 먹는 건 현지에서 해결할 예정이다. 그래도 겨울짐이 부피가 크다.

도착한 곳은 인천 왕산 해수욕장의 "서해 캠핑장", 글램핑과 카라반을 운영하는 곳인데 바닷가 쪽으로 빈자리에서 차박을 할 수 있다. 날이 추워서 그런지 우리 차 포함 딱 두 대 뿐이다.


주변에 편의점도 식당도 보이니 식사 걱정은 안 해도 되겠다. 아이는 약속이나 한 것처럼 주차하자마자 라면 먹고 싶다고 성화다. 캠핑 = 라면의 공식이라도 있는 것인가?


짐도 안 내리고 바로 편의점에서 컵라면과 간식거리를 사는데 아이가 포켓몬빵이 있다며 깜짝 놀란다. 와우! 그 구하기 어렵다던 빵이 종류별로 있다. 편의점 사장님께서 저 뒤에도 있다 알려주시니 마침 같이 들은 다른 손님도 빠른 손놀림으로 포켓몬빵을 주어 담으신다. 아마 어린아이가 있는 아빠겠지?


아이는 춥지만 바다를 바라보며 컵라면을 즐기고, 나는 부지런히 잠자리를 세팅한다. 텐트를 안 치면 정말 간단히 잘 수 있을 것 같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차에 있는 짐들을 다 꺼내놔야 하고, 등이 배기지 않을 만큼의 푹신한 것들을 깔아야 한다. 난방도 체크해야 하고, 제일 무서운 일산화탄소를 체크할 감지기도 양쪽에 하나씩 설치한다.


정말 가벼운 차박을 하고 싶었지만, 따뜻한 차 안에서 안 나오는 딸을 피해 이것저것 챙겨야 하고, SUV 중 큰 몸집을 자랑하는 트래버스라도 2인 이불을 깔면 여유 공간은 더 이상 없다.


너무 좁다, 그런데 평소 모든 상황에 까다로운 딸이 무심한 표정으로 아이패드 그림 그리기 삼매경인 걸 보니 불편하진 않은 것 같다. 간간히 재밌냐 편하냐 물어보니 무심히 끄덕거린다.


너무나 예민하여 매번 부딪히는 그 딸이 맞나 싶다. 우리가 부딪히는 이유는 딸이 예민하기 때문이 아닐 수도 있겠다.



먹을 것도 할 것도 없지만..

좀 쉬었으니 저녁을 먹어볼까?

금세 어둠이 내린 비수기의 바닷가는 어둡고 쓸쓸하다. 간간이 보이는 식당은 조개구이집뿐, 이제보니 우리가 한 끼 때울 곳은 없어 보인다. 아이는 조개를 싫어한다.

이러다 굶는 거 아닌가? 슬슬 불안해져 배민에서 검색이라도 해보지만, 나오는 건 '텅'. 그런데 아이가 먼저 저녁은 편의점에서 사 먹자고 한다. 추워서 안 나간다하길래 혼자 나가 편의점 메뉴를 살펴보니, 도시락도 없고 순 안주거리 들뿐이다. 아이가 먹을까? 고민이 되었지만 삼각김밥과 떡볶이를 익혀다 주니 바로 이맛이지! 하며 너무 맛있게 먹는다.


좁은 차 안에서, 공용화장실도 얼어 관리실로 다녀야 하는 불편한 상황에서도 평소 잘 안 먹는 밥을 저리 맛있게 먹다니.. 뿌듯하기도 하지만, 평소 집에서도 이렇게 즐겁게 먹으면 얼마나 좋을까 속으로 생각한다.


춥지만 불멍을 하기 위해 겨울 내내 집에 보관하던 장작 박스를 열었더니 곰팡이가 한가득이다. 동생과 가려고 미리 주문해 놨었던 거다. 장작은 앞으로 보관하지 말아야겠다. 급하게 편의점에서 한 망을 사서 잠깐의 불멍을 즐기는데 너무 춥다. 최강 한파가 몰아치고 얼마 되지 않은 뒤라 그 차가움은 아직도 남아 있다. 결국 차 안에서 혼자 타는 장작을 지켜보는 걸로 만족했다.


추운 바닷가, 좁은 차 안에선 정말 할 게 없다. 그래도 아이랑 어쩔 수 없이 대화해야 하고 뭔가 같이 해야 한다. 우리는 요즘 숏츠로 많이 뜨는 ‘환상의 커플’을 같이 보며 깔깔대다 잠이 들었다.



마주 보고 웃음이 터지다

무시동 히터 덕에 따뜻하게 잘 잤다. 비싼 돈 주고 설치하고 이번에 처음 제대로 쓰는 거다. 돈이 좋긴 좋다. 영하 10도가 가까운 날씨에 이 정도 따뜻하게 자다니..


그러나 쾌적하게 잔 것과는 다르게 영 거지꼴이다. 개수대조차도 얼어 입구 관리실까지 가야 세수라도 할 수 있다. 간단하게 양치할 공간을 차에 만들어둬서 거기서 종이컵으로 물을 흘려가며 고양이 세수를 했다. 그 모습을 본 아이가 빵 터진다. 엄마 너무 웃겨.


어머나, 지금 머리에 새집하나 얹고 차에서 라면 먹고 있는 너도 너무 웃겨. 우리는 마주 보고 깔깔댔다.



간단히 짐을 정리하고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근처 핫플레이스 카페를 가보기로 한다. 꼬질꼬질한 차림새와 가시지 않은 불멍냄새에 우리가 물을 흐릴 것 같지만 당당하게 가서 빵만 사고 나오자.


소금빵이 유명하다더니 역시 맛있다. 빵을 먹으며 시시콜콜한 대화를 하며 집에 도착했다.




반짝이는 바다를 즐긴 것보다, 아이랑 오랜만에 가까이서 부대끼고 큰 소리로 웃을 수 있어 의미 있던 시간이었다. 많은 돈을 쓰지도, 비싼 숙소를 예약하지도, 재밌는 액티비티를 한 것도 아닌데 우리의 짧은 1박 차박 여행은 많은 여운을 남겼다.


우리는 편안한 집에서도 서로 상처를 주고받는다. 아주 약간은 집에서도 여행처럼 즐겁게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 같은 힌트를 얻은 것도 같다.


지금은 얼마 전 한 발수술 회복 중이라 당분간 차박이나 캠핑 계획을 세울 수가 없다. 회복되고 날도 좀 풀리면 이렇게라도 나가 아이와 그냥 보내는 시간을 더 많이 가져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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