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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치 Jul 23. 2023

잠든 아이, 깨워 내기

등교 거부 64일~67일, 약간의 희망

밤낮이 바뀐 상태도 심각한데, 이제 아이의 하루는 밤뿐이다. 깨어있을 때도 컴컴한 방에서 씻지도 않고 잘 먹지도 않고 폐인처럼 있다. 아이의 유튜브 검색기록과 SNS를 유심히 관찰해 보지만 특이한 점은 찾지 못했다. 문 앞에서 여러 번 설득해야 나에게만 살짝 열어주는데, 그때 보이는 모습은 흡사 돌봄 받지 못하고 야생에서 마구 자란 비쩍 마른 아기 맹수 같다.





2023.07.14 (64일째)

이 날도 간신히 아이 방에 들어가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어떤 말을 걸어도 멍한 눈으로 틱톡 영상만 볼뿐 대답이 없다. 갑자기 휴대폰에 보이는 나에겐 의미 없어 보이는 영상들에 답답해져 고개를 돌리자, 아이패드가 눈에 띄었다. 아이는 아이패드로 그림 그리고 로블록스 게임을 하느라 밤을 새운다. 아이의 전부이기에, 뺏을 생각은 솔직히 없었다. 다만, 아이를 깨우고 싶었다.


"오늘부터 11시에 아이패드 엄마에게 맡기고 자, 너 자꾸 밤을 새워서 안 되겠어. 그렇게 낮밤이 바뀌면 건강도 안 좋아지고 다시 바꾸기가 힘들어."


역시, 효과는 있었다. 어떤 다정한 말투에도 반응 없던 아이가 눈을 크게 뜨고 악을 쓰기 시작했다. 내용은 뭐.. 사춘기를 요란하게 겪어 본 엄마들은 예상하실 그런 내용들이다.


아이가 순순히 아이패드를 맡길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생각보다 더 거친 반응에 나도 물러설 순 없었다. 결국 아이패드를 뺏자 아이는 나에게 달려들었고, 난 손도 대지 않았건만 내가 자기를 때렸다고 악을 쓴다. 집안이 난장판이 되었다. 난 112에 전화를 했다. 바쁘신 경찰분들을 부르는 게 무척 죄송하지만, 집안에 무서운 사람이라곤 없는 아이가 진정이 안되니 제삼자의 도움이 필요했다.


집 근처에 지구대가 있어 경찰관 두 분이 바로 오셨고, 한 분은 아이에게 가시고 한 분은 나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경찰관과 외할머니가 강제로 문을 따자 아이는 커터칼을 손목에 대고 노려보고 있었다고 한다. 아이와 한참 얘기를 나누고 내려오신 경찰관은 아이 방에서 위험한 물건은 가위 밖에 없더라며 가위를 건네주시며, 아이패드를 돌려주라고 하신다. 부모마음도 이해하지만, 위험한 행동을 할 수 있는 상태라 우선 진정시키라는 의미이다. 그리고 이런 일들이 그분들께 익숙한 것처럼 느껴졌다.


커터칼을 들고 있었다는 사실이 크게 놀랍지 않았다. 사실, 난 아이가 그런 행동을 하지 않을 거라는 걸 안다. 그저 2평짜리 방 안에서 본인을 지키기 위한 방어일 뿐. 난 그렇게 믿고 싶다. (물론 그런 낌새가 보일까 늘 예의주시하고 있다.)


아이패드를 들고 아이 방에 들어가 대화를 했다. 잘한 건지 긁어 부스럼인지는 모르겠지만, 우선 아이가 입을 열었다. 엄마가 왜 아이패드를 가져갔었는지 이유를 얘기하며, 그러나 그렇게 강제로 하는 건 잘못된 방법이었다고 사과했다. 아이도 직접 말하진 않았지만, 잘못된 점을 지적해 주니 수긍했다. 그리고 오랜만에 사이좋은 모녀로 돌아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얼마만인지...


"엄마가 일주일 휴가 낼 테니까 우리 동해에서 '일주일 살기' 이런 거 해볼까?"

"좋아."


힘든 상황에 어딘가 숨어버린 나의 추진력이 다시 발동되었다. 동해는 성수기라 숙소 잡기가 힘들고, 제주도로 방향을 틀려던 찰나, '나 일본 편의점에서 파는 푸딩 먹고 싶어'란 말에 바로 우리의 일주일 살기는 일본으로 정해졌다.


2023.07.14 - 07.16 (65-67일째)

아이패드 사건이 있어 우리 가족 마음엔 큰 상처가 남았지만, 긍정적인 것은 아이 방문이 다시 열렸다는 것이다. 환하게 켜진 아이 방이 반갑다. 들어가 청소도 해주고 이불도 빨아 교체해 주었다. 이렇게 이렇게 한 발 한 발 다시 나오기를..


그러나, 그날 선생님께서 들르셨지만 어느새 방에 숨은 아이는 끝내 문을 열지 않았다. 가족 외에 누구도 방에 들어오는 게 싫다고 하니 우선 천천히 기다려보기로 하고 선생님께서도 문 앞에 편지를 두고 돌아가셨다.


그래, 천천히 가자. 방문이라도 열린 게 어디람.

아이가 좋아하는 일본 여행을 하며 많이 편해져서 다시 예전의 수다쟁이 딸로 돌아오면 좋겠다. 피곤해서 밤이 되면 스르륵 잠이 들면 좋겠다. 그리고 한국에 돌아왔을 땐 다시 건강해지면 좋겠다. 이런 희망으로 주말은 비행기표를 예매하고 숙소를 고르느라 바쁘게 보냈다.




아이패드는 아이의 전부다. 아이패드로 그린 그림을 SNS에 올리면 팔로워들에게 칭찬과 가르쳐달라는 요청이 달린다. 유일하게 성취감을 느낄 수 있는 수단인 것이다. 그래서 뺏으면 안 되었다. 내 방식이 잘못된 걸 인정하지만, 아이를 깨울 방법을 몰랐다고 핑계를 대고 싶다. 이렇게 아이는 다시 말문이 트였고 우리는 일주일간의 여행을 계획하게 되었다. 잠시 희망적이었다.


그러나 결국 여행은 취소되었고, 아이는 다시 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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