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유동 May 13. 2024

천사의 옷차림


딸과 함께 키즈카페를 갔다. 널찍한 공간에 형형색색의 놀잇감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어른인 나도 이런데 다섯 살짜리 꼬맹이의 눈에는 어떨까. 힐끗 고개를 돌려보니 딸의 눈동자는 이미 불타오르고 있다. 조막만 한 얼굴은 금세 복숭앗빛으로 물들고, 다리 근육은 씰룩인다. 마치 육상선수처럼 시작 신호를 기다리는 듯. 아빠의 카드결제 소리를 시작으로 딸은 달려 나간다. 신발은 벗고 가야 할 텐데. 의미 없는 걱정을 속으로 삭이며 나 또한 신발을 넣고 입장한다. 저 멀리 버려진 신발. 딸은 열두 시가 되기 전에 나가버린 신데렐라처럼 자신의 유리구두 두 짝을 키즈카페 입구에 흘렸다.


키즈카페는 노는 장소지만, 마냥 놀기만 하는 장소는 아니다. ‘놀고먹기’라는 비공식 관용어를 보라. 노는 일에는 먹는 일이 함께하기 마련이다. 이런 조언을 충실히 이행하는 듯. 놀잇감 옆에는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과자와 음료수가 진열되어 있다. 딱히 배고프거나 목이 마르지 않아도 좋다. 그런 친구들은 상표에 부착된 캐릭터가 손짓한다. 아직 말을 못 하는 아기들은 색깔이 부른다. 분홍색, 빨간색, 노란색의 음료수들. 이런 시각정보는 본능적으로 알아채기 마련이다.


어디선가 간식만으로 부족하다는 계시가 내려온 모양이다. 신전처럼 꾸며진 키즈카페는 신탁을 받아 식당까지 만들어놓았다. 가족과 함께 식사하며 오랜 시간을 이곳에서 보내라는 속내다. 부모로서는 아쉬울 것이 없다. 아이는 나가고 싶지 않고, 부모는 아이의 밥을 먹여야 하고. 노는 장소에서 밥까지 해결하면 서로 윈윈이다. 놀랍도록 매끄러운 키즈카페의 문법은 모든 이에게 적용된다. 입장한 부모는 신도가 되어 기꺼이 따른다. 까끌까끌한 마찰요소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부모의 눈 속에 ‘광신’의 그림자가 스며든 탓일까. 가끔 생기는 예외는 스태프로 분한 장로들이 말끔하게 제거한다. 이런 모습이 가끔은 비인간적으로 느껴진다. 투명한 유리, 잡티 하나 없는 거울, 하얀 백지처럼.

 

완벽한 무결성 앞에서 결점은 선명하게 드러나는 법이다. 모니터의 픽셀 이상이 눈에 확 띄는 것과 같다. 자연스레 카멜레온을 떠올린다. 환경 변화에 맞춰 자신의 몸 색깔을 바꾸는 사기적인 위장술. 그런데 카멜레온이 새하얀 종이 위에 있다고 가정하면? 아무리 변신의 귀재라도 금방 눈에 띄지 않을까. 키즈카페에서 돌발상황이 생겼을 때, 요란하게 드러나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에서다.


아이가 상기된 얼굴로 달려오고, 나는 안아준다. 갑자기 오른쪽 어깨가 뜨뜻해진다. 그렇게 딸의 옷과 내 어깨는 토사물 범벅이 됐다. 아이는 어찌할 줄 몰라서 내 옷을 잡아당기고, 아빠는 능숙하게 아이를 달래준다. 괜찮다고. 네 잘못이 아니라고. 이건 좀 이상한 일이다. 나는 결벽증이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국밥을 먹을 때 입가에 국물이 튀면 휴지로 닦는다. 다 먹고 나면 내 자리엔 휴지가 산더미처럼 쌓인다. 남이 먹던 음식은 먹지 않고, 손을 빈번하게 닦는다. 그런데 딸이 토한 상황에서 나의 결벽증은 모두 잊혔다. 왜일까.


가끔 딸과 대화를 나누다 보면 깜짝깜짝 놀란다. 아이라고 부끄러움을 모르는 게 아니다. 자신의 기호를 명확하게 표현한다. 좋으면 좋고 싫으면 싫은 어엿한 인간. 이런 경험을 자주 하면 아이를 한 명의 인간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딸이 자신의 옷을 버리고 아빠 옷까지 버렸을 때 느꼈을 감정이 생생하게 전달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세상의 모든 아빠는 딸바보다. 이렇게 자명한 원리는 아빠의 결벽까지도 무력화시킨다. 내 옷이 더러워지든 말든, 지금은 딸의 감정이 우선이다. 이후 주변의 양해를 구하고 옷을 닦은 뒤 아이를 다독인다.


아이를 데리고 화장실에 갔다. 아이는 고개를 숙이고 나는 등을 두드리며 묻는다. “괜찮아?” 아이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아빠 얼굴을 바라보며 답한다. “나는 토하면 속이 괜찮아져.” 딸의 대답에 잠시 울컥했다. “괜찮아”라고 현재 상태를 답하는 것이 아니라, 아빠가 걱정할까 봐 자신을 객관화하여 답하는 방식. 그 섬세함이 아빠의 마음을 다독인다. 물론 이렇게까지 깊이 생각하고 답한 것은 아니었겠지만, 나의 마음은 딸의 답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해석한다. 내 걱정이 더 컸던 걸까. 아니면 죄책감에서 비롯된 감정일까. 사실 딸이 토한 건 내 탓이다. 먹고 바로 뛰어놀도록 하고, 먹기 싫어하는 아이에게 계속 먹으라고 강요했기에. 여린 아이의 위장이 그런 과부하를 감당하지 못했으리라. 아이는 놀면서 먹었고, 먹으면서 놀았다.


더러워진 옷을 입은 채 씩씩하게 걸어가는 딸의 모습이 보인다. 나도 모르게 눈이 시큰해진다. 알 수 없는 감정에 휩싸인 나는 딸의 손을 잡고 옷가게로 들어간다. 봄에 어울리는 화사한 옷을 고르고, 탈의실로 데려가 갈아입힌 다음 거울을 바라본다. 그곳에는 천사 한 명이 웃으며 서 있다. 문득 깨닫는다. 처음부터 천사는 옷의 청결 여부와 관계가 없었음을. 아빠가 딸을 생각하는 마음. 딸이 아빠를 배려하는 마음. 이런 것들은 외양과 관계없이 견고하게 존재한다는 진실 말이다.

이전 02화 중단의 미학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