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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유동 May 10. 2024

중단의 미학


새벽 다섯 시 반. 딸이 엉엉 울며 내 침대로 기어들어 온다. 놀란 것 같아 등을 두드려주며 같이 자자고 말하지만, 딸은 놀아달라며 보챈다. 내 아침 일과가 헝클어지는 순간이다. 딸을 사랑하는 마음과 무관하게 내 마음속에서 이름 모를 화가 고개를 내밀기 시작한다. 아이에게 이런 마음을 품었다는 사실에 죄책감을 느낀다. 화와 죄책감 사이의 진자운동. 차라리 이런 양가감정이 정지한 상태로 ‘존재’만 한다면 좋으련만. 그 감정들은 나의 기대를 저버리고 자기 멋대로 출렁인다. 마치 파도가 세게 몰아치는 바다처럼. 나는 그 위에서 위태롭게 서핑을 하고 있다.


언제나 딸이 먼저다. 그러므로 매번 나의 화는 억눌린다. 문득 궁금해진다. 화는 사라진 걸까 잠시 숨은 걸까. 아니면 폭발할 때를 기다리며 몸집을 부풀리고 있는 걸까. 무얼 하는지 모를 나의 화. 처음에 탄생한 ‘화’와 억눌린 ‘화’가 다른 얼굴을 하고 있다는 점은 참 흥미롭다. 곧바로 야누스 신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그는 시작과 끝, 그리고 이중성을 상징한다. 시작의 화는 불안에서 비롯된 화. 딸이 놀아달라고 했을 때, 나는 아직 마음의 결정을 하지 못했으므로 수많은 미래의 가능성이 살아있는 상태다. 끝의 화는 영원한 상실에서 비롯된 화. 기회비용이 그러하듯, 어느 하나를 선택한다는 것은 선택되지 않은 모든 가능성의 소멸을 전제한다. 시작과 끝은 동전의 양면일 수밖에 없을까. 앞면의 존재가 뒷면의 비존재에 의해 지탱된다는 사실이 나를 막다른 골목으로 몰고 간다. 나는 딜레마에 빠졌다.

     

이런 점에서 ‘프랭크 스톡턴’의 단편소설 《두 개의 문》은 참고할 만하다. 두 개의 문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문제. 한쪽엔 사자가 있고 다른 한쪽엔 공주가 있다. 단순해 보이지만 생사가 결정된다는 점에서 중대하다. 인간은 이런 상황에 직면하면 무언가 선택해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리기 마련이다. 역사가 성립되기 이전부터 생존을 위해 DNA에 각인된 본능. 생존을 위해서는 미리 다음에 일어날 일을 생각해야 하기에 ‘현재’에 집중할 여력이 없다. 현재를 빠르게 건너뛰기 위한 좋은 방법은 현재를 소유하는 것. 현재의 ‘존재’를 숙고하지 않아도 되므로 효율적이다. 그렇게 인간은 현재를 소유함으로써 현재에 관한 관심을 끊는다. 관심은 다시 미래로 쏠린다. 삶이란 이런 일의 반복이다. 이런 미래 중독자들 같으니라고.

    

나는 내 앞에 놓인 두 개의 문을 서늘하게 응시한다. 한쪽엔 아직 살아있는 가능성이 있고, 다른 한쪽엔 선택받은 하나의 가능성만이 서 있다. 문을 열어야 할까. 이건 미래를 생각하는 일이다. 미래는 현재를 제물로 삼아 우리를 조급하게 만든다. 잠시 멈춰서 현재를 숙고하면 다른 선택지가 보인다. 문을 열지 않고 머무르는 일. 바로 지금, 여기에 집중하는 일이다. 이렇게 마음을 먹자마자 울며 보채는 딸이 생생하게 느껴진다.

   

새삼 깨닫는다. 우리의 세계는 흙투성이의 땅 위에 생생하게 실존하는 세계다. 내가 인식했던 시작의 ‘화’와 끝의 ‘화’는 과거-현재-미래로 이어지는 시간의 직선. 그 어딘가에 찍힌 점일 뿐이다. 과거는 이미 지나갔기 때문에 지금에 없고, 미래는 아직 도래하지 않아서 역시 지금에 없으며, 있는 것은 오직 현재뿐이라는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처럼 시간의 중심은 존재론적으로 현재에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현재에 충실한 삶은 빛난다. 하루하루를 의미 있게 보내려는 노력보다 가치 있는 일이 또 있을까. 그것이 비록 언덕 위로 돌을 굴리는 시시포스와 같은 고난의 길일지라도. 지금 여기 존재함. 생생하게 살아있음을 자각하는 것은 삶을 태양처럼 빛나게 만든다. 이것이야말로 니체가 말한 ‘정오’다.

      

‘프랭크 스톡턴’의 이야기 속 청년은 공주의 암시에 따라 결국 오른쪽 문을 연다. 그로 인해 우리의 시야는 한 점으로 좁혀지고 문 뒤에서 기다리고 있는 무언가를 상상하게 하지만 나는 다시 문을 닫고 조용히 재판장으로 돌아온다. 이것이 두 개의 문 앞에 선 나의 선택. 선택하지 않음을 선택함으로써 끝없는 불안에 빠지더라도 지금의 삶에 남아 있겠다는 나의 작은 다짐이다.

    

어느 새벽녘, 미소를 되찾은 딸의 눈동자 속에 아침 햇살이 떠오른다. 나 또한 웃으며 딸의 눈동자 속 햇살을 복사한다. 도화선에 불이 붙듯. 복제된 ‘서광(曙光)’은 내 마음속 불안을 누그러뜨린다. 중단이 가져온 행복. 나는 이를 미학(美學)이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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