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진기행-서울 1964년 겨울
1965 《서울 1964년 겨울》
카바이드 불이 바람에 흔들리는 선술집에서 우연히 담소를(가장한 배틀을) 나누게 된 스물다섯 동갑 '안'과 '나'는 서울이라는 도시에 취해 대화를 시작한다.
서대문 버스 정거장에는 사람이 서른두 명 있는데 그 중 여자가 열일곱 명이었고, 어린애는 다섯 명 젊은이는 스물한 명 노인이 여섯 명입니다.
그건 언제 일이지요?
오늘 저녁 7시 15분 현재입니다.
아.
단성사 옆 골목의 첫 번째 쓰레기통에는 초콜릿 포장지가 두 장 있습니다.(중략)
그 사실은 완전히 김 형의 소유입니다.
그 후 가난뱅이인것이 분명해 일말의 호기심도 일지 않는 서른대여섯 살의 남자를 만난 이들은 서울이라는 도시의 비정함이 극대화되는 일련의 사건들을 겪는다.
김 형, 꿈틀거리는 것을 사랑하십니까?
소유와 무소유, 의미와 무의미의 축제에서 발화된 불꽃은 마치 쿤데라옹의 배꼽 담론처럼 농담과 사유의 경계를 넘나든다. 그리고 한 사람은 짐작하고 또 한 사람은 짐작하지 못한 세 번째 남자의 비극을 목도한다.
아ㅡ, 다함께 이ㅡ찌이만, 외로운 사람들.
김 형, 우리는 분명 스물다섯 살짜리죠?
우리가 너무 늙어 버린 것 같지 않습니까?
우리 이제 겨우 스물다섯 살입니다.
누군가는 만원 버스안에서 오르내리는 아랫배의 움직임을 내려다보는것으로, 또 누군가는 데모democracy를 입에 올리것만으로도 꿈틀거리게 되는 뜨거운 욕망의 집결지 서울.
허나, 1964년 서울의 새벽은 쎄하다.
1970 《50년후, D파이9 기자의 어느 날》
2020년 서울. 디파이나인은 소형 전기 자율 주행 자동차ㅡ GUIYOMI19로 어디론가 달리고 있다. 화상 통화를 하며, 대체육인 인조베이컨을 먹는, 어떠한 부작용도 없는 항우울제를 삼키는 시대. 인공 자궁에서 탄생한 알파 박사는 빛보다도 빠른 광속 비행체에 대한 가설을 세우나 우주로 뻗어 나가고 싶어 하는 인간들의 욕망에 회의를 느낀다. 뜻밖의 공포에 짓눌리면서 절망한 박사는 디파이나인에게 특종을 남겨주며 출생의 비밀이라는 2연타를 안겨 주고 슬픔과 눈물이 '부재'하는 가공의 세상에서 존재의 이유를 찾는것은, 최첨단 2020년에 여전히 팩시밀리를 쓰는 것만큼이나 아이러니한 무의미를 상기시킨다.
아ㅡ무런 말어없이 어디로 가는가ㅡ.
우리는 도대체 어디로 가고 싶어 한단 말인가. 우리가 획득하기를 욕망하는 가장 빠른 속도란 광속의 몇 천 배 몇 만 배 아니 그 이상의 속도가 아닌가.
2023 <서울 1998년 겨울>
안 형. 전전두엽을 찢어놓는듯한 한기를 처음 맛보는 자의 공포를 아십니까. 저혈압 부산 여자를 몸서리치게 만드는 눈발은 그 어떤 낭만이 있습니까. 고드름이 달린 채 얼었다 녹았다 황태가 되던 빨래에는 해학이 있습니까? 상경한 풋내기 약자에게는 생의 의미는 없었습니다. 생의 존속이 절실했습니다.
김 형. 저는 겨우 스물다섯 살이었습니다.
60년대의 김형과, 90년대의 저. 2000년대의 디파이나인. 뭐가 달라졌나요. 청년은 항상 꿈틀거리면서도 고뇌합니다.
의미가 무언지도 모르면서 찾고 싶어합니다.
서울이란 놈의 장력은 그리도 무서운겁니다.
저는 어떤 욕망을 품고 서울로 향했을까요?
추억이란 그것이 슬픈 것이든지 기쁜 것이든지 그것을 생각하는 사람을 의기양양하게 한다. 슬픈 추억일 때는 고즈넉이 의기양양해지고 기쁜 추억일 때는 소란스럽게 의기양양해진다. ㅡ서울 1964년 겨울
슬픈 추억에도 퍽 소란스럽게 의기양양해질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 그리고 2023년의 나는 여전히 서울을 욕망한다. 부족을 느껴 무엇을 가지고자 탐하는 게 아니다. 그저 도시의 비정함에 눈물 흘릴 수 있는 인간이 되었기 때문이다.
무진기행이 표제작인 단편집중《서울1964년겨울》
SF김승옥중《50년후, D파이9 기자의 어느 날》
두권의 책과 한 사람의 이야기로 엮었습니다.
2023년 10월 2일
무진기행을 원작으로 한 영화 <안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