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에게 가장 민감하고도 중요한 화두를 꼽으라면 단연 '승진'일 것이다. 삼성에서 여성들의 승진은 과연 순조로웠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전혀 그렇지 않았다. 지금은 당연하게 여겨지는 풍경들이 과거에는 거대한 벽 앞에서 망설이며 멈춰 서야 했던 시간들의 기록이었다.
삼성은 1974년 한국반도체를 인수하며 반도체 사업의 닻을 올렸지만, 반도체 사업부에서 여성 부장이 처음 탄생한 것은 2000년대 초반에 이르러서였다. 내가 과장으로 진급한 후 참석한 여성 간부 교육에서 당시 '삼성반도체 최초의 여성 부장'을 강사로 만났다. 1985년 무렵 입사했던 그분은 진급 당시 청와대에서 이희호 여사를 접견했을 만큼, 여성이 부장이 된다는 것은 국가적으로도 이례적인 사건이었다. 그분의 회사에서의 여정도 만만치 않았다. '결혼을 하면 회사를 그만두겠지', '애를 낳으면 당연히 회사를 다닐 수 없겠지'라는 주변의 인식들을 돌파하며 어렵게 만들어낸 역사였다.
나는 반도체 연구소로 입사했다. 신입사원 교육 당시 한 강사는 85년도에 입사한 어느 여성 엔지니어를 입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일처리 능력이 압도적이라는 소문이 자자해 나 역시 같은 여성으로서 그분의 행보를 관심 있게 지켜보았다. 하지만 유능함만으로는 부족했던 것일까. 그녀는 끝내 부장 승진의 벽을 뚫지 못한 채 회사를 떠나 미국의 한 연구소로 향했다. 그녀 외에도 국내 최고 대학 박사 출신 선배들조차 그 문턱을 넘지 못하는 것을 보며, 한동안 부장 진급은 여성들에게 허락되지 않는 성역처럼 느껴졌다.
그 단단했던 유리벽이 어떤 과정을 거쳐 균열을 내기 시작했는지 그 내막을 정확히 알 수는 없었다. 다만 내가 진급을 앞둔 몇 년 전부터 여성 부장들이 하나둘 등장하기 시작했고, 조금씩 열리기 시작한 문틈 사이로 바람이 들어왔다. 그 변화의 결을 타고, 나 역시 운 좋게 부장 자리에 설 수 있었다. 물론 쉽지만은 않은 일이었다.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부장 진급에 몇 번 누락되면 회사를 떠나야 하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고, 부장 진급을 앞두고 나도 과연 진급이 가능할지 밤잠을 설치며 마음을 졸였던 기억이 선명하다.
진급 확정 후 가장 잊지 못할 순간은 뜻밖의 장소에서 찾아왔다. 평소 오가며 인사 나누던 청소 아주머니께서 내 소식을 듣더니, 내 손을 덥석 맞잡으며 "정말 축하한다"라고 말씀하셨다. 마치 자신의 일처럼 기뻐하시며 한참을 손을 놓지 않으셨다. 그 따뜻한 손의 온기를 느끼는 순간,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나의 승진은 단지 개인의 성취가 아니라, 회사내의 많은 여성 후배들에게, 작게나마 희망의 신호가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말이다.
조직에서 한 사람의 승진은 단순한 인사 발령이 아니다. 그것은 그 조직이 어떤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하고, 누구에게 기회를 허락하며, 무엇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지에 대한 선언과도 같다. 오랫동안 여성의 승진이 드물었던 현실은 개인의 능력 부족이 아니라, 구조적 관성과 무의식적 편견이 작동해 온 결과였다.
‘여성 최초’라는 수식어가 반복된다는 것은, 그 자리가 오랫동안 특정 성별에게만 열려 있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진정한 변화는 ‘최초’가 사라질 때, 다시 말해 누가 그 자리에 오르든 더 이상 성별이 화제가 되지 않을 때 완성된다.
또 하나 분명한 사실은, 대표성의 힘이다. 한 명의 존재는 상징이 되고, 상징은 기준을 바꾼다. 내가 부장이 되었을 때 청소 아주머니가 보여준 기쁨은, 그 직함이 개인의 성취를 넘어 집단적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말해준다. 조직 안에서 소수자가 높은 자리에 오르는 일은 단순한 승진이 아니라, “여기도 가능하다”는 신호를 사회 전체에 보내는 행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