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인 수녀의 봉숭아
대학교 1학년 여름방학이 끝날 즈음, 그 친구가 직접 만들어 건넨 책갈피 속에 이 시가 적혀 있었다. 시를 다 외우고도 마음속으로 수십 번은 되새겼던 것 같다.
봉숭아(이해인)
한 여름 내내
태양을 업고
너만 생각했다
이별도 간절한 기도임을
처음 알았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
어떻게 잊어야 할까
내가 너의 마음 진하게
물들일 수 있다면
네 혼에 불을 놓는
꽃잎일 수 있다면
나는
숨어서도 눈부시게
행복한 거다
'한 여름 내내 태양을 업고 너만 생각했다'.
그냥 아름다운 시 하나를 건넨 것인지, 아니면 여름 내내 나만 생각했다는 것인지.. 그 자그마한 책갈피가 내 마음에 불을 놓아버렸다.
여름방학이 시작될 무렵, 방학 동안에 탁구를 배우고 싶어 같은 과 친구들 몇 명에게, "나한테 탁구 가르쳐줄 사람?" 하고 물었을 때 예상치 못했던 그 친구가 손을 번쩍 들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여름방학 동안 일주일에 3일을 꼬박꼬박 만나 탁구를 치고, 같이 밥을 먹고, 커피숍에서 함께 공부하고, 때로는 잔디밭에서 그 친구의 기타 반주와 함께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여름방학이 끝나고 다시 학기가 시작되어 다른 친구들과 함께 섞여 이야기할 때, 나는 친구들 틈에서 전처럼 그에게 편하게 말을 건넬 수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리고 다음 학기 내내 수업시간엔 늘 내 주변 가까이 어딘가에 그가 있었다. 우리는 친구들 눈을 피해 도서관 구석자리에서 같이 공부하고, 내 자취방 근처의 커피숍에서 만나기도 하고, 음악회와 연극을 보러 가기도 했다.
웃으면 눈이 동그랗게 변하고, 목젖이 유난히 튀어나왔고, 문학과 음악을 좋아하던, 그 당시의 내 눈엔 어느 연예인 못지않게 잘생겼었던 친구였다.
그러나, 한 학기를 조금 넘게 진행된 우리의 사랑은, 내 종교적인 신념과 그 친구의 민주화에 대한 열망의 삐걱 거림 속에 흐지부지 마무리되었고, 지금 그에 대한 기억은 한 편의 시로만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