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생계를 위한 경력 한 줄이 슬퍼질 수도 있구나

1장의 7번째 이야기 : 내 이야기를 쓰려면 먹고살 돈은 벌어야지..

by 기린아놀자


사람들이 가끔 내가 한 다양한 일과 알바를 했다는 얘기를 들으면 놀랄 때가 있다.

대부분 '그런 것까지 했다고요? 안 그래 보이는데?' 같은 느낌인데..

안 그래 보인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굳이 물어보진 않았다.

나는 그런 사회생활이 훗날 내가 작품을 쓰는데 분명 도움이 된다고 믿고 있었지만

현실적으로 그렇게 열심히 산 이유는 당연히 '돈' 때문이었다.

먹고살아야 하는 문제.

솔직히 생계가 어느 정도 해결이 되어야 글도 쓸 수 있지 않은가?

누군가에게 "이런 이야기 어떠세요?" 하고 보여주려면

공모전에 도전하려면

글을 써서 먹고살 수 없으니까, 그런데 글을 쓰기 위해서 다른 일을 해야 하는 건 필수라고 생각했다.

언젠가 글을 서서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전업작가가 될 나를 꿈꾸며...


그런데 그런 나의 경력들이 누군가에겐 왜 했는지 알 수 없는..

시간을 낭비한 사람처럼 여겨질 수 있다는 걸 깨달은 순간이 있었다.




정식 보조작가는 아니고 시대극 드라마라 자료조사 및 정리가 급해서

그것만 정리해 줄 사람을 찾고 있다는 곳에 친한 동생이 소개를 해 주었다.

원래 그 동생이 제안받은 자리였는데, 사정상 하기 어려워서 나를 소개해 준 것이었다.

물론 같이 해보고 괜찮으면 보조작가로 채용해서 함께 작품을 만들어 나갈 수도 있다고 했다.


개인적으로 시대극을 좋아하고 들어보니 흥미로운 소재였다.

무엇보다 잠깐이라도 현업 작가님의 작업실에서 작업하시는 것도 보고

그 주변에서 생활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고맙다고 무조건 하겠다고 했다.

이력서를 보냈고, 면접을 봤다.



작가님은 두 분 이셨는데, 내 이력서를 보시며 이것저것 질문을 하셨다.

- 학교는 다니면서 어땠냐.

- 졸업하면서 쓴 시나리오는 어떤 내용이었나.

- 사는 집에서 작업실이 좀 먼데 힘들진 않겠냐..

- 짧게 하는 일인데.. 괜찮냐. 물론 하다가 정식으로 채용할 수도 있다... 등등


성의껏 대답하고, 작가님들도 편안하게 분위기를 만들어 주셔서 편안한 분위기였다.

그런데, 작가님 중 한 분께서 이렇게 물어보셨다.

"근데 왜 이렇게 뭘 많이 했어요? 작가랑 관련 없는 일인데?"


순간.. 어?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이력서를 정리할 때 써넣은 것들은 대부분 이쪽 분야와 관련된 일이었는데

그중엔 내가 단편영화를 연출한 것이나, 홍보영상을 만드는 일을 했던 것.

저예산 영화의 연출부와 스크립터로 일한 것이었다. 영화 예술강사로 일한 경력도 짧지만 넣었다.


나는 작가랑 관련 없는 일로 보일 수 있지만 다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한다고 말씀드렸다.

결국 드라마나 영화가 사람들 이야기인데, 사람들과 섞인 경험이 없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고..

그리고 저런 작업들을 통해서 좋은 인연들도 많이 만났다고..

하지만 내 이야기를 듣고도 동의할 수 없어하는 작가님의 표정을 읽었다.

머릿속이 하얘지는 기분이 이런 것일까?


그러자 다른 작가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난 생계를 위해서 한 일은 다 존중해"

질문하신 작가님도 동의하셨지만.. "그래도 좀 시간 낭비 같아서..." 란 말로 쐐기를 박았다.


맞는 말씀이었다.

작가는 글로 나를 보여줘야 하는 것이니까.

그렇게 영화 촬영 현장을 다니고 할 시간에 시나리오를 한 편이라도 더 쓰고

작법 책을 읽고 글쓰기 공부를 하고 다른 사람들의 작품을 보면서 습작을 하고..

그게.. 분명 작가와 관련된 일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시나리오가 늘 써지는 것도 아니고, 내가 틈틈이 그런 것들을 하지 않은 것도 아닌데..

그걸 다 설명하자니 구차하게 느껴졌다.

무엇보다 시.간.낭.비 라는 말이 각인되어 지워지지가 않았다.


그 뒤는 잘 생각이 나지 않는다. 내가 뭐라고 했는지. 어찌어찌 웃으면서 인사를 하고 작업실을 나왔다.

면접을 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나의 과거가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면서

난 열심히 살았는데.. 그랬다고 생각했는데.. 아닐 수도 있구나.. 슬퍼졌다.


그런데 신기하게 두 분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나에게 기회를 주셨다.

감사합니다 하고 열심히 1시간 30분이 되는 거리를 제일 먼저 출근해서 준비를 하고

작가님들의 커피를 준비해 드리고


방대한 자료들의 한자를 한글로 변환해서 읽기 쉽게 정리하고 목차를 만들어서 내용을 분류했다.

중구난방의 폰트를 정리해서 가독성 있게 정리하고 가끔 작가님께서 알아봐 달라고 하는 것들을 찾아보았다.

두 분은 다 잘 대해주셨다. 밥도 잘 사주시고... 담배를 피우지 않는 나를 신기해도 하셨다.


그러나 2주 정도의 자료조사의 기간이 끝나고 난 뒤, 나를 보조작가로 고용하진 않으셨다.

"나이가 많고.. 그냥 입봉 해서 바로 작품 써야 할 사람인 거 같아서. 보조작가로 쓰긴 부담스러워요"

"네.. 감사합니다. 많이 배웠습니다."

이게 끝이었다.


다시 슬픔이 몰려왔다.

생계를 위한 경력 한 줄이 많은 나이의 증명이구나.

그리고 누군가에겐 시간낭비로.. 누군가에겐 부담으로 느껴질 수 있는 것.

그 맘을 털어내려 그날 하염없이 걸었던 기억이 선명하다.



여전히 저때를 생각하면 쿡쿡- 쑤시긴 하다.

시간이 꽤 흐르기도 했고 마음을 많이 정리해서 지금은 과거의 내가 시간낭비 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난 분명 열심히 살았고 그 과정에서 남들이 알지 못하는 배움과 성장이 있었다.

그 일을 하지 않았던 이전의 나와, 하고 난 지금의 나는 분명 다르다고 믿는다.

다만, 내가 글만 썼다면 지금 입봉을 하긴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게.. 나이만 먹은.. 여전히 지망생인 나의 자리인 걸까?


생계를 위한 경력 한 줄이 슬퍼질 수도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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