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외> 나에게 부족한 건, 자존감인가 자신감인가?

계약 종료된 드라마 작가 지망생의 일기 (1)

by 기린아놀자
너의 글이, 글을 쓰는 스타일이나 느낌에 틀린 건 없다. 잘못된 게 아니다.
다른 유명한 작가를 따라 할 필요 없다.
흉내 내는 건 결국 바닥이 드러나기 마련이다.
너는 너의 방식으로 묵묵히 너의 이야기를 쓰고 있어야 한다.
그럼, 어느 날 운 좋게 너의 글을 좋아해 주고 잘 쓴다고 생각하는
제작자나 PD가 나타나서 그 사람들이 작품을 만들어주고 팔아주는 것이다.


이 말은.. 내가 가장 존경하고 나의 신경안정제이자 글을 쓰는데 가장 힘이 되었던 교수님께서

하신 말씀이었다. 이 말을 듣고 충격 + 신선한 자극이 컸어서..

그날의 느낌과 기분.. 강의실의 풍경까지.. 지금도 이 글을 쓰면서 떠오른다.

( ※ 정확히 저렇게 말씀하시진 않았지만... 내용은 저러하다 )


왜 이 말을 또다시 떠올렸는가?

2025년 1월 말. 설 전에 있었던 일 때문이었다.




제작편수가 줄어들고 있는 영화와 드라마의 현실을 보며

나처럼 나이는 많지만 입봉은 못했고

뛰어나진 않지만 어느 정도 쓰기는 하는 작가 지망생이 설 자리는 그림자도 없음을 느끼면서

막막함

아니

답답함

그 어느 쪽에도 설 수 없는 지경에 이르다 보니

가만히 있으면 누가 나에게 일을 주는 것도 아니고

내가 움직여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적극적으로 연락도 하고 사람을 만났다.

작품 좀 보여달라고 하면 보내주고, 내 작품이 아니더라도 모니터 해달라고 부탁하면

열심히 읽어서 느낀 점을 얘기하고 아이디어도 주면서

슬쩍 '나도 있어요~' 어필하며 홍보를 하기도 했다.

전혀 알지 못하는 제작사 어딘가에서 작가를 구한다고 하면 이력서를 보내고 기획안도 써서 보냈다.


나는 극 I에 걱정, 불안도 많고 생각도 성격에 누군가 만나서 "나 잘해요~" 자랑을 하는 걸

어려워하는 성격이다. 내가 그렇게 할 만큼 꽤 간절했고.. 많은 에너지를 쓴 것이었다.

그래서인지 혓바늘도 나고 입술도 터지고.. 매일 두통에 시달려서 두통약을 먹고 잠이 들었다.


그러다 마지막으로 연락을 가장 고민했던 사람.

지난, 나를 드라마 계약으로 이끌어 주었던 PD 님과의 만남을 했다.

2025년 1월 말. 설 전에 꼭 뵙고 싶었는데,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가장 큰 이유는 나의 지난 드라마 작업에 대한 궁금한 점을 물어보고 싶었다.

그랬다. 나는 내 지난 2년간의 작업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그곳에서 계속 발버둥 치고 있었던 것이다.

( 이 드라마에 대한 이야기는 다른 장에서 따로 쓸 예정이다. )


약속 장소에 1시간 30분 걸려서 갔는데.. 40분 동안 마주 앉아 대화를 하고 나서

나의 속은 뭉그러졌다. 그야말로 와르르 무너지는 기분-

갑자기 일이 생겨서 바쁘면 차라리 다음에 보자고 나에게 연락해 줬더라면 좋았을 텐데..

시선은 휴대폰에 가 있었고, 대화보단 문자 답 하고 연락하기 바쁜 상황이었다.

이해한다. 회사에서 맡은 일이 많으시니까.


근데 그것보다 나를 무너지게 했던 것은

내가 작업한 드라마에 대한 이야기를 조심히 꺼냈을 때의 그 표정. 말하기 싫어하는.. 큰 한숨이었다.

말에 집중하지 않고 기계적으로 네네- 하며 문자를 타이핑하는 모습에

난 입을 닫고 창 밖... 도로에 달리는 자동차들을 하염없이 바라봤다.

건물이 고층이라 전경은 좋은 곳이라 다행이었다고 해야 할까?

타이핑 소리만 흐르는 미팅 룸의 침묵 속에서

'아.. 내가 괜히 왔구나. 얼른 내가 가야겠구나..' 알았다.

그래도 이왕 왔으니 다른 작업 있으면 좀 기회를 달라고 부탁이라도 해봐야지 싶어서

"작가님 안 바쁘세요? 요즘?" 하는 물음의 의미를 알면서도

PD님이 원래 그런 사람은 아니잖아. 나는 알잖아. 우리가 본 세월이 있는데...라는 생각을 하며

그 자리를 버티다

"요즘 이쪽 바닥 어렵다고 하는데. 가만히 있는다고 절 알아주지도 찾아주지도 않으니까

여기저기 연락하면서 다니고 있어요."라고 만남을 청한 이유를 말했다.


(중간 이야기들은 생략하고)


이후, PD님은 지금 잘되고 있는 로맨스 장르의 드라마들을 언급하면서

분위기가 돈 많이 안 들면서 인기 끌 수 있는 그런 것들을 써야 한다며

배우도 특급 말고 이미지 좋으면서 연기력 있는 배우들을 캐스팅하거나 신인을 발굴해서

만들어야 한다는 말을 건넸다.


저런 말들은 나도 할 수 있다.

나에게 새겨 들어야 한다며 하는 말들이 결과론적이지 않은가?

그 작품이 잘 되어서 하는 말이었다.

기획이란 그런 것이 아니지 않은가?

지금 채널들에게 로맨스 장르를 원할지 몰랐을 것이다. 근데 로맨스 장르 대본을 원한다?

그런데 그건 미리 준비해 놓은 사람만이 쟁취할 수 있는 것이다. 운도 따라줘야겠지.


난 그저 듣고 네네- 하다가 마지막 운도 따라줘야 한다는 한마디를 했다.

그러자 "운도 노력해야 따라줄 수 있어요"라는 말에 솔직히 조금 화도 났다.

왜냐하면, 머릿속에 이런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노력해 왔잖아요.

내가 쓴 장르가 그런 장르 아닌가요?

내가 로맨스 장르 쓸 땐, 시청률 안 나오는 거라고 비관적인 의견을 많이 줬잖아요?

제가 괜찮지 않냐고 추천했던 배우님들 별로라고 했는데, 그분들 지금 다 잘됐잖아요?


뒤에 이어진 PD님의 말들은

내가 얼마 전에 한 일들의 성과에 사람들이 요즘 제작 검토를 위해 시나리오나 대본을 많이 주는데

너무 바빠서 2달은 기본적으로 기다리라고 한다.. 요즘 바빠서 사람도 잘 안 만난다.

라는 말과 나의 드라마 대본 작업과 엮인 어떤 인물의 잘못에 대한 평가였다.

지금 제작하려고 준비하는 영화의 주인공이 유명 배우라는 것도 알려주었다.

네.. 그렇군요..


왜 나에게 이런 말을 하는지 모르겠으면서도 알 것 같았다.

난 일어나서 나가야 한다.

더 이상 붙잡아 두면 안 된다. 그걸 원하고 있다.

적어도 나는 눈치 있는 작가로 남아야 한다.


그래서 일어났다.

최대한 웃으면서 "바쁜데 괜히 왔네요. 그래도 시간 내주셔서 감사해요. 설 잘 보내세요" 하고 왔다.

하지만,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에 내려와 화장실에 들어갔는데 울컥 눈물이 쏟아졌다.

나는 마지막 순간에 나오면서

"그래도 일 좀 주세요!! 혹시 작가 급히 필요하거나 하면 연락 주세요. 돈 많이 안 주셔도 돼요.."

라고 말한 내가 좀 가여워서.

나에게 글을 준다는 건, 돈을 투자하지 않으려 하는 경우라고 자존심을 스스로 구겨놓고

살고 있었다는 걸 깨달아서..


차라리 내가 쓴 대본에 대한 장점과 단점에 대해 깊이 있게 대화를 나눴으면 좋았을 것이다.

"작가님 대본 별로예요" 란 말은 면전에 두고 하기 힘들었을 것이니

보완되면 좋은 점에 대해서라도..

근데 대본도 보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순간 맨 위에 쓴 저 교수님의 말씀이 생각났다. 말씀의 의미를 비로소 제대로 알 수 있었다.

100% 완벽한 대본.. 있을 수 있지만 없는 경우가 더 많다.

그럼 그 작품을 최소한 애정하며 성의 있게 읽는 사람이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그때 빛을 볼 수 있다는 것

행여 부족한 게 많다 하더라도 작품으로 만들어 질 수 있다는 것.

기획을 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나야 한다는 것.

그거 참 운이 좋아야 겠구나 싶다.




나에게 부족한 건 무엇일까?

많이 있겠지. 근데 이번 일로 다짐한 게 있다.


적어도 나 스스로 나를 구겨지게 하진 않아야겠다.



덧,

이 일을 다 들은 친한 언니가 한 말도 큰 위안이 되었다.

"그래도 마지막까지 버티고 일 달라고 하면서 웃으며 나온 게 대단하네. 나라면 못 그랬을 거야."

그랬다. 그 점은 잘했다고 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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