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 눈앞의 상처를 보며 괴로워한다. 그가 보고 있는 건 둘째 딸 다리의 상처이다. 잠이 든 둘째에게 다가가 다리 위 상처를 보며 약을 먹어야 하는 거 아니냐고 다른 연고를 발라야 하는 것 아니냐며 내가 발라주는 연고를 믿지 못했다. 그런데 남편 말대로 먹어서 상처가 나을 수 있는 약이 있을까?
상처는 스스로 회복될 수 있다고 믿는 나, 눈앞의 상처를 보고 싶어 하지 않는 남편이다. 아이 다리의 상처를 계속해서 지켜봐 왔던 나는 상처가 낫고 있는지 악화된 상태인지 구별할 수 있다. 이런 나와는 반대로 남편은 상처의 크기와 상태와는 상관없이, 큰일이 난 것처럼 화가 나 나를 탓한다.
나의 상처로 남을 탓할 수는 없다. 다른 사람의 상처도 마찬가지다. 그 사람이 보고 있는 것은 당장 내 눈앞에 있는 것이지만, 그 속엔 보이지 않는 깊은 마음속 상처가 있다. 그걸 알아채지 못한다면 절대로 그 상처를 마음의 상처로 이해할 수 없다. 그 상처가 없어지지 않아 종종 될 뿐이다.
삶은 종종 된다고 나아지는 것이 아니다. 어떤 일이든 시간이 필요하다.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그 일이 나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바라보지 못하고 쉽게 지나쳐 버리거나 회피해 버리면 내 마음의 풍요는 쉽게 채워지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면 아이 다리 위 상처는, 자국이다. 상처가 딱지가 되고 그 딱지가 허물어져 새 살이 나야 하는데, 아이는 그 과정을 기다리지 못하고 긁어서 딱지를 뜯어냈다. 상처가 낫는 과정에서 생기는 간지러움을 참지 못하고 뜯어낸 딱지는 깊은 상처를 내고 회복이 되지 못한 채 갈색 자국을 남겼다.
남편은 상처와 자국을 구별하지 않는다. 무조건 눈앞에 보이는 것들은 모두가 상처다. 남편은 왜 이리도 눈에 보이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걸까? 집안에 쌓인 먼지나 얼룩을 닦아내면서도 연신 "더러워, 더러워"를 외친다. 당장 눈앞에 보이는 더러운 것들도 피부의 여러 흔적도, 보지도 견디지 못하는 남편은 정작 자신의 마음은 드려다 보지 못한다.
불현듯 떠오르는 부정적인 감정은 알고 보면 마음속 깊이 내재되어 있는 상처이다. 그 상처를 인식하지도 바라보지도 않으니 수면 위로 떠오르는 감정이 본인의 것이지만 남의 탓으로 돌리고 만다.
책상 밑에 만든 둘째 아이만의 공간-등을 달아주었다
둘째 아이는 자신만의 물건과 자신만의 공간이 중요하다. 온전히 자기를 받아줄 수 있는 것들이다. 자신이 아끼는 물건은 자신을 탓하지도 혼내지도 않는다. 자신만의 공간은 안식처이며 아지트이다. 자신만의 공간을 만들고 그 속에 들어가는 아이의 성향을 알고, 나는 그 공간을 절대 건드리지 않는다.
자꾸만 자신만의 공간을 만들고, 보물창고를 만드는 아이를 보다 문득, 아이가 자신만의 공간에서 편안한 숨을 쉬고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이는 그곳에서 숨을 쉬고 상처를 회복하고 있을 거라는 믿음이 있다. 그 공간은 그 어떤 강요도 명령도 비난도 없는 무해한 공간이며, 무한히 아이를 받아주는 곳일 거라고.
내가 상처는 스스로 회복되는 것이라고 믿는 이유는, 상처를 꺼내 들여다보고 쓰다듬어 줄 수 있는 도구가 있기 때문이다. 둘째 딸에게는 그것이 자신만의 애착 물건이고 공간이다. 마음은 자꾸 감추고 숨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표정으로 보이지 않아 무표정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만 누군가는 그 사람의 마음을 읽는다. 그 사람이 그런 표정을 짓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을 거라고 말이다.
수줍어 보인다고 부끄러워한다고 마음에 욕심이 없는 것이 아니다. 상대가 자꾸만 욕심을 고집이라 생각해 자꾸 짓밟고 뿌리 뽑으려고 안간힘을 쓰니 표현을 하지 않게 되는 것일 뿐이다. 어느 날 지인의 카톡 프로필 사진을 보게 되었다. 아이가 엄마에게 쓴 편지였다. 아마도 어버이날이라 학교에서 손 편지를 썼던 것 같다. 아이의 예쁜 글씨를 보며 감탄하다 마지막 줄의 문장을 보고 내 눈이 멈춰 섰다.
'앞으로 말을 더 잘 듣겠습니다.' 내가 좋아하지 않는, 기피하는 말이다. 조금은 극단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그 말속에서 들리는 메시지는, '원치는 않지만 엄마를 위해서 엄마가 하라는 대로 하겠다'였다. 엄마는 내가 원하는 것을 좋아하지도 않고 매번 하지 말라 하고 이렇게 행동하고 이렇게 말해야 한다고 하니까 더는 엄마를 설득할 수 없어 포기하겠다는 느낌이 들었다.
지인과 아이의 성향을 알기 때문에 이렇게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 판단은 피해야 한다고 하지만, 한 번은 아이의 속마음을 들여다보고 싶었다. 내 아이도 그렇지만 말이다. 교육관도 육아관도 다르기에 건드릴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아이의 말이나 행동에 처음부터 지적을 하거나 판단을 해서는 안 된다. 반복되는 거절과 충고는 마음의 상처를 만들고, 다른 사람에게 맞춰지는 나로 만든다.
눈앞의 상처는 회복과 성장의 기회를 준다. 상처를 없애보겠다고 전전긍긍해도, 어쩔 수 없이 회복되는 시간이 있어야 한다. 여기에 상처를 낫게 하는 약이 있다면 더 좋을 것이다. 살짝 손이 베거나 넘어져 상처가 나도 시간이 지나고 나면 새살이 돋아 어느새 원래의 피부로 돌아온다. 그렇게 상처는 회복이 된다.
상처가 낫는 속도는 개인마다 차이가 있을 것이다. 마음의 상처도 그렇다. 마음이 아프거나 힘들 땐 부정하려 하지 말고 자신만의 공간에서 자신만의 치료법으로 회복을 하는 것도, 그 상황을 이겨낼 하나의 방법이 된다. 자신은 자신이 잘 알고 있으므로...
글쓰기는 내게 마음을 회복할 공간과 시간을 준다. 어떤 특별한 공간이 아니다. 익숙한 집이라는 공간에서, 편안한 마음으로 글을 쓸 수 있으면 된다. 오로지 나에게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을 찾아 글쓰기라는 도구로 나를 찾아간다. 새로운 나가 아닌 원래의 나이다. 나의 의견이나 생각 감정들을 묻어야 했던 시간들은, 나를 억눌렀고, 나를 아프게 했다. 그건 내가 아니다.
상처가 시간이 지나 회복되어 원래의 피부로 돌아오는 것처럼, 나 또한 글쓰기로 원래의 나로 돌아온다. 그것이 가장 새롭고 창의적인 것이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