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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우주 May 06. 2024

나를 위한 따뜻한 밥 한 끼를 차려본다

자작하게 내려앉은 공기사이로 걸어 들어간다.

그리고 부엌장을 살며시 열어본다. 그 안에서 단정하게 접힌 채 누군가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는 마른미역봉지를 집어 들었다. 부스럭부스럭... 한 손을 집어넣어 느낌만으로 칼칼하게 굳어버린 미역을 대략 한 주먹 가볍게 집어, 물이 찰랑거리는 커다란 볼에 살며시 담근 다.

조금씩 물과 숨을 들이켜는 미역들의 구겨진 얼굴들이 확대되어 보이기 시작하고 나는 그저 미역들이 다시 되살아나는 모습을 멍하니 지켜본다. 그리고 어느 순간 지금에 존재하지 못하고 지난날의 회상 속으로 끌려들어 갔다.

"미역국은 푹~~ 아주 푹~~ 끓여, 오래 끓여야 돼. 그래야 맛있어."

아빠가 끓고 있는 미역국을 무심하게 쓰윽 한번 쳐다보더니 넌지시 말을 던진다. 말투에선 미역국이 농익어 있었고 자꾸만 그 목소리가 선명하게 내 귓가에 맴돌았다.

 



내일은 아빠의 첫 제삿날이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 아빠와의 이별 후 아빠를 위해 나는 다시 미역국을 끓였다. 영혼이 된 아빠를 위해 내가 해줄 수 있는 일, 나의 마음을 보여줄 수 있는 방법, 나의 사랑을 전달하기 위해 선택한 방법, 아니 어쩌면 나의 슬픔을 달래주기 위해 선택한 방법일지도 모르겠다.

전라남도 해남에서 태어났지만 아빠는 전라도의 화려하고 진귀한 수많음 음식들 이 있었음에도 담담하고 소박한 미역국을 아주 많이 많이 좋아했다.

고기가 들어가지 않은 오직 미역만이 이름처럼 고유한 주자리를 차지하며 하루 반나절 이상 푹 고아진 미역국은 그렇게 정성의 보살핌으로 담백하고 입안을 부드럽게 열어주는 아주 깊은 풍미로 나를 황홀하게 만들었었다.

 

늘 하던 대로 달아오를 때로 달아오른 들기름의 품 속으로 뛰어들어가 자글자글 온몸 가득 고소미를 입고 뜨끈하게 볶아져 자신만의 그윽한 향을 1차로 풍겨주고, 은은한 불 위에서 옅은 진동으로 보글거리며 오랫동안 내쉬는 쉼은 바닷속을 유희하던 시절의 온전한 바다의 향까지 모조리 토해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탄생한 미역국은 아빠에 대한 그리움이 녹아든 나의 사랑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었다.  




이른 아침, 눈꺼풀의 최소한의 저항 아래 의식만이 지금을 인지하고 있을 때 코끝을 가볍게 쓸며 미끄러지듯 폐 속까지 도달하여 구수함으로 내 온몸을 달래며 깨우던 밥이 뜨겁게 익어가는 냄새, 김의 폭주를 알리는 그 밥알들의 향연은 엄마가 있기에 마음 편하게 잠을 잘 수 있었던 어린 시절에 나를 떠올리게 했고 그 편안한 아침의 다정한 울림은 어른이 된 나에겐 로망의 대상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이젠 내가 밥을 짓는 다. 손끝에서 느껴지는 겹겹의 쌀알갱이들의 통일성 있는 움직임, 그리고 그 속에서 피어 오른 뽀얀 색채물, 그 짙은 밀도의 순백색 물결을 창가에 자리 잡고 있는 식물들과 공유하고 엄마가 알려준 대로 손등의 뼈마디 위까지 마음의 물결을 차오르게 한다. 엄마가 없는 밥 짓기이지만 구수하고 촉촉한 맛있는 향은 언제나 엄마를 나에게 안겨주었고 이 애틋한 마음이 지어낸 깨끗한 쌀밥이 완성되었다. 그렇게 나는 영혼을 담은 아빠에게 조촐하지만 깊은 사랑의 밥 한 끼를 차려줄 수 있었다.


그리고 이제 알게 되었다. 언제나 기분 좋은 반가움을 자아내는 음식은 단순히 굶주린 배를 채우는 것이 아닌 마음을 채우는 사랑이었기에 그리 환영스러웠다는 것을.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누군가와 나누고 싶은 것은 사랑을 나누고 싶은 것이며,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누군가 떠오른다면 그 사람을 사랑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그래서 사랑이란 말 대신 따뜻한 갓 지은 밥 한 끼를 차린다. 그리고 아빠가 보고 싶을 땐 미역국을 끓인다. 이로 나는 사랑을 할 수 있게 되었다.




흰 구름 위를 걷는 듯, 부드러운 밥알 하나가 내 마음속에 안착한다.  
 아침 햇살 아래, 점심의 여유를 지내고 저녁노을을 닮은 밥상 위에선
 수저와 젓가락이 오케스트라 연주를 시작한다.

 

손맛 좋은 사랑의 정성이 한 숟가락, 두 숟가락 삶의 온기를 더하고

그렇게, 밥 한 톨의 여정은 우리의 일상 속에 스며들며 소박한 행복을 전했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잊힌 추억의 미소를
 밥 한 숟가락으로, 국 한 숟가락으로 소환하고

그대가 걸어온 길 위에 흩날리는 꽃잎처럼

사랑의 밥상을 흩뿌려본다.

 

식사하셨나요?

오늘도 나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따뜻한 밥 한 끼를 차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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