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안녕 Aug 11. 2021

나의 글쓰기는 엄마와 닮았다.

  나의 서재엔 메모장, 필기구, 노트북이 있다. 노트북의 사양이 좋지는 않지만 남편의 배려로 대형 모니터까지 연결해서 글을 쓰기엔 생각보다 쾌적하다. 하지만 몇 번 작업하곤 포기했다. 바로, 아침에 일어났을 때, 혹은 잠결에 엄마가 없으면 바로 깨 버리는 아이 때문이다.


  어제 아침만 해도 그렇다.

  코로나 백신 1차 접종 후기를 쓰고 싶었다. 실제론 월요일에 시작한 글을 어제라도 마무리하고 싶었던 것. 웬일로 7시 즈음에 눈이 떠지기에 몰래 나와 글을 쓰는데 아이가 날 찾았다. “엄마!"하고 우는데 가지 않을 수 없다. 마치 오랫동안 엄마를 본 적 없는 아이처럼, 느낌표 열 개쯤 달린 목소리로 서럽게 우는데 외면할 수 없었다.


  그럴 땐 내가 옆에 누워서 토닥여 주면 금세 잠에 다시 빠져드는데 어제는 조금 오래, 그리고 자주 울었다. 거의 10분가량을 뒤척이며 울더니 급기야는 내 배를 베고 잠이 들어 버린 것이다. 아... 절망스러웠다. 문제는 이게 비단 어제 하루만의 일이 아니라는 것.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 아이패드나 휴대폰으로 글을 쓴다. 아이가 깊은 잠에 빠졌을 땐 아이패드를 켜고 브런치 앱을 켜 바로바로 적어 내려간다. 쓰고 싶은 글감만 잡히면 닥치는 대로 마구 써 내려가는 것이다. 누가 뒤에서 쫓아오는 사람처럼. 아니, 시험 종료 1분 전에 답지에 마킹을 하는 학생이 된 것처럼.


  그런데 그것도 여의치 않은 날, 그러니까 어제 같은 날은 어쩔 수 없이 휴대폰을 이용해 글을 쓴다. 처음엔 너무 작은 화면, 눌리지 않는 터치식 패드가 불편했는데 그것도 하다 보니 익숙해졌다.


  글감을 적어 놓는 정도로만 사용했던 휴대폰이 글쓰기 장치가 된 것은 '지금 생각난 것을 적지 않으면 휘발되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 같은 불안감'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늘 마음이 바쁘다. 아이가 자고 있을 때, 혹은 잠시 티브이를 볼 때, 간식을 먹을 때, 휴대폰을 꺼내 짧게라도 글을 적는다. 그래서 내 ‘작가의 서랍’엔 제목과 소재만 적은 글들이 수두룩 하다.


  며칠 전에 작성한 <분홍 소시지를 찾아서>가 그렇게 완성한 글이다. 그날도 역시 아이는 6시부터 나를 찾았고 나는 언제나처럼 옆에 누웠다. 그리곤 휴대폰을 꺼내 조심스레 글을 이어 썼다. 그렇게 한 시간 반 정도의 시간을 투자해 완성했다.


  옆에서 낑낑대는 아이가 깰까 봐 조명도 최대한 낮춰 조마조마하게 완성한 글, 제대로 퇴고하지 못한 채 급하게 올려 버린 글. 작은 화면으로 편집해서 인지 구성도 내용도 많이 빈약해 보이는 글. 그래서 그 글엔 나의 '조바심'이, 나의 현 상황이 그대로 묻어나 있다.


  '나도 편하게 작업실에서 커피 마시면서 글 쓰고, 집중해서 퇴고하고 싶다...'


  <꼬박 3일을 아팠습니다>도 휴대폰으로 겨우 완성하고 딸아이 옆에 누운 후, 감성에 빠져 슬픈 나를 현실로 불러들인 것은 딸의 기상. 울적한 마음을 뒤로한 채 '엄마'로서의 시간을 위해 몸을 움직였다. 아침밥상, 설거지, 점심 밥상, 청소, 설거지, 그리고 저녁밥상, 설거지. 중간중간 놀이와 낮잠 재우기는 필수 옵션인 시간들로 하루를 가득 채웠다.


  누군가의 ‘엄마’가 되니 나의 ‘엄마’가 더 그리워졌다. 문득 그 옛날 엄마의 하루가 머릿속을 떠다녔다.




  어릴 적 엄마는 부지런한 성격 탓에 늘 시간에 쫓겼다. 전업주부에서 워킹맘이 되자 더 심해졌다. 하루가 48시간이어도 모자랄 매일을 보내며 엄마는 언제나 닥치는 대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처리해나갔다. 당시 게으르고 이기적인 나는 엄마를 도와주긴커녕 늘 일감을 더 주기에 바빴다. 가령, 집에 하루 종일 있으면서도 빨래 한 번을 하지 않는다던가, 일 끝나고 밤 10시에 돌아온 엄마에게 "먹을 반찬이 없어. 엄마. 뭐 맛있는 거 없어?"라고 하는 등의 철없는 행동들 말이다.

 

  그러면 엄마는 정말 아무것도 하기 싫을 텐데도 '가만있어 보라'며 냉장고를 뒤적이며 내일 반찬거리를 머리로 그리곤 했다. 그리고 아침에 일어나면, 엄마는 없고 그 자리에 엄마의 반찬들이 놓여 있었다. 밥상보 위에 적힌 작은 메모와 함께.


[네가 좋아하는 두부조림이랑 계란말이 했다. 약불에 덥히면 된다]


  늦어도 7시 30분까지 출근해야 했던 엄마가 '두부조림'과 '계란말이'를 하기 위해선 좀 더 빨리 일어났어야 했을 것이다. 또 엄마는 잠들기 전, 쌓여있는 빨랫감도 눈에 밟혔을 것이다. 그래서 새벽 5시 반엔 일어나 빨래를 돌리고, 반찬을 만들어 냈을 것이다. 30분 안에 빠르게. 그리고 맛있게. 한창 예민한 고등학생인 둘째를 위해, 휴학 후 힘들게 아르바이트를 하는 첫째를 위해, 그리고 새벽같이 나가서 당신보다 더 늦게 들어오는 남편을 위해.


  내가 지금 쫓기듯, 빠르게, 시간을 쪼개고 쪼개서 글을 쓰는 것처럼, 우리 엄마도 쫓기듯, 빠르게, 시간을 쪼개서 빨래도 하고, 설거지도 하고, 음식도 했을 것이다. 엄마는 일을 하고 오면 손가락 까닥하기 싫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면서도 한 순간을 쉬지 않았다. 그렇게 꾸린 엄마의 살림은 탄탄했다. 힘든 상황에서도 쉬이 무너지지 않았다. 우리 가족의 삶이 무너지지 않았던 것은, 아마도 굳은 심지로 꿋꿋하게 버텨준, ‘가만히 쉬고 있으면 뭘 하니. 뭐라도 해야지.’라고 말한 엄마 덕분일지도 모른다.


  맞다. 지금 나의 글쓰기는 ‘엄마’와 닮았다. 하루하루 주어진 시간을 허투루 보내지 않으려는 마음으로 쓰는 글쓰기. 물론, 엄밀히 말하면 우리 엄마의 마음은 오롯이 ‘가족’을 향했고 나의 마음은 ‘나’를 향하고 있지만.


  또, 우리 둘은 엄연히 자체적인 ‘마감’이 있다는 점에도 비슷하다. 엄마는 출근 시간이, 나는 딸의 기상 시간이 마감이 된다. 그래서 우리는 그 마감이 오기 전까지 필사의 노력을 한다. 다만, 엄마는 내공이 단단해 매번 좋은 결과물을 내지만 나는 글쓰기 내공이 탄탄하지 못해 들쑥날쑥 한 게 다르긴 하다만.


  그래도 엄마와 나의 ‘마음’, 무언가를 간절히 해내고 싶다는 그 마음 하나는 같지 않을까. 그 마음이 결국 삶을 풍요롭게 하지 않을까.




  나는 휴대폰으로 글을 쓰는 게 싫지 않다. 편안한 환경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고 꿋꿋하게 꾸준히 글을 쓸 수 있으니 생각할수록 좋은 것도 같다. 마침, 오늘 다 읽은 <내 하루도 에세이가 될까요?>라는 책에서 저자는 일단 쓰는 것, 쓰기 시작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러니 환경을 탓하지 말고, 도구를 탓하지 않고, 지금처럼 꾸준히 쓰고 싶다.


  우리 엄마가 새벽 5시 30분에 일어나는 것을 불평하지 않은 것처럼. 한 번도 그 삶을 멈추지 않은 것처럼. 나도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겠다. 꾸준히 쓰겠다. 멈추지도, 포기하지 않겠다. 설령 계속 휴대폰으로 글을 써야 할지라도.




매거진의 이전글 분홍 소시지를 찾아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