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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녕 Nov 29. 2021

딸기가 온다

미각으로 느끼는 너의 겨울

딸기가 돌아왔다.


한 팩에 13,000원이나 하는 걸 큰 마음먹고 사다 씻어주니 벌써 노래를 부른다. 야호, 신난다, 딸기다 딸기! 하며 싱크대 옆에서 춤을 춘다. 그 모습을 본 나는 '그렇게도 좋을까' 하며 빙긋 웃었다. 새콤 달콤하면서도 오물오물 맛 좋은 딸기가 어찌 싫을 수가 있을까. 이제부터 겨울이 깊어질 때까지, 그 겨울 지나 따뜻한 봄이 올 때까지 그렇게 실컷 먹을 수 있고, 먹일 수 있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좋아졌다.


한 번은 마트에 데려간 적이 있었다. 40도가 육박하는 바깥의 열기를 피하기 위해 들어간 마트에서 녀석은 계속 딸기를 찾았다. "엄마, 딸기는 어디 있어요? 딸기 먹을래."라고 하기에 "딸기는 지금 없어. 딸기는 겨울에만 나오는 과일이거든" 이라며 답해주었다. '여름'이고 '겨울'이고 아직 흐릿하게만 느끼던 녀석은, 이해를 못 하고 '딸기 달라'며 울고 불고 난리였지만 없어서 못주는 상황이라는 것을 대충 눈치채고는 울음을 그치고 말았다. 그리고 그 후부터는 계속 '겨울은 언제 오냐'며 묻곤 했다.


녀석의 겨울 타령은 끝이 없었다. 여름부터 시작된 '겨울'은 '가을'까지 이어졌다. 조금만 더 추워지면 겨울이야, 하니 정말 '조금'만 더 추워진 날에도 '겨울'이냐고 물었다. '낙엽'이 떨어져야 겨울이라고 했더니, 가을비에 떨어진 '낙엽'을 보고 이제 겨울이라고 손뼉을 쳤다. 눈이 와야지, 눈이 펑펑 내려야지 겨울이지, 했더니 며칠 전 내린 눈을 보고 '엄마! 겨울이에요!' 하며 소리치는 것이 아닌가. 도대체 왜 이렇게 겨울에 집착할까. 겨울에 태어난 것도 아니면서, 하며 의아해하고만 있었다.


가만 생각해보니 먹성 좋은 우리 딸이 제철과일'로 계절을 느끼는 것 같다. 덥고, 춥고, 선선하고, 따뜻한 감각보다도 딸기가 나오느냐, 사과가 나오느냐, 복숭아가 나오느냐의 여부로 계절을 느끼는 것이다. 그러니까 '겨울이 언제 오냐'는 질문은 '딸기가 먹고 싶다'는 뜻이고 '이제 더운 여름이에요?' 하면, '복숭아는 언제 나오냐'는 뜻이다. 먹성 좋은 딸과 함께 사는 입 짧은 엄마는, 딸의 의중을 파악하는데 4년이 걸렸다.


그렇게 좋아하는 딸기를 일 년 내내 실컷 먹으면 참 좋으련만, 귀하디 귀한 딸기는 사과 같지 않아서 수확 후 냉동해 두고, 먹으면 그 맛이 떨어진다. 탱글탱글한 과육, 신선한 꼭지, 그리고 겉에서 풍기는 달큼한 냄새가 깡그리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하필이면 수많은 과일 중 딸기를 좋아해서, 녀석은 아마도 '겨울'을 평생, 애타게 기다릴 것 같다. 그러니 이제 시작된 겨울 내내 나는 그저 꾸준히, 딸기를 사다 먹이며 행복을 나눠줄 예정이다.


나이가 들어버린 나는 겨울을 어두운 하늘로만 기억한다. 아직 동도 트지 않은 아침에 서둘러 통근 버스를 타러 나가는 길에 만나는 하늘은 늘 새까맸기 때문이다. 거기에 강한 바람까지 불어버리면 온 몸을 바르르 떨게 만들었다. 촉각을 곤두세우게 하는 그런 심술궂은 계절. 나의 겨울이다.

딸은 겨울을 새콤달콤한 '딸기'로 기억한다. 따뜻한 방바닥에서 색칠놀이하며 놀다 엄마가 씻어준 딸기를 오물오물 먹으며 느끼는 그 달콤함. 코와 입과 혀가 즐거워 온 몸을 바르르 떨게 만드는, 미각이 춤을 추는 그런 행복한 계절, 녀석의 겨울이다.


어쩐지 딸의 겨울이 더 낭만적인 것 같아 부러운 마음이 든다. 미각으로 기억하는 계절이라, 그 순수함이 부럽다.   




딸기가 온다.



말랑말랑

몰캉몰캉

복숭아가 한 철 잘 놀다가

사라지면


아삭아삭

사각사각

새빨간 사과가

데굴데굴 입 안에서 실컷 구르다가

돌아가면


부들부들

후루룩 춥춥

맛 좋은 단감이 사르르 녹아내리다

까치밥이 되어버리면  

 

나뭇잎 후드득 떨어지고

첫눈이 몽글몽글 내리다가

어느덧 온 세상이 하얗게

물들어 버리면


딸기가 온다.


찬 바람이 코끝과 손끝을

간질이며 몸이 움츠러들면


딸기가 돌아온다.





photo : unsplash

monika grabkows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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