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안녕 Feb 05. 2022

다 나으면, 다 나으면 말이야

너와 함께 해보고 싶은 것들

드디어 체온계가 변화하기 시작했다. 39도는 거뜬히 넘던 것이 오늘 오전부터는 38도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하더니 병원 가서는 정상 체온까지 내려갔다. 진짜 다행이다. 코로나 때문에 열이 나면 병원 가는 일도 번거로워진다는 것을 익히 알기에 노심초사했다. 진료도 못 받고 나올까 봐. 그래서 오늘 밤도 아이가 밤새 기침하다 왈칵왈칵 토하게 될까 봐.


열이 가라앉아서일까. 아이의 컨디션도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 중간중간 기침을 하다 소화가 덜 된 음식들을 게우긴 했지만. 그래서 그때마다 꽤 길게 울긴 했지만. 그래도 어제보단, 그래도 그제보단 나아지고 있음에 감사하고 있다.




아픈 녀석은 하루 종일 티브이만 찾았다. 평소보다 두 배로 늘어난 집안일(아기가 토한 옷, 이불 빨래만 해도 산더미. 아이가 아프면 일이 밀리고 밀린 일은 차곡차곡 쌓여 금세 두 배, 세 배가 된다.)을 하느라 어쩔 수 없이 보여주면서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이런 날에도 곁에서 놀아줄 수 없는 상황이 원망스럽기도 했고.  


예민해진 녀석은 이걸 틀어 달라, 저걸 틀어 달라, 끊임없이 요구했다. 아픈 상황은 이해하면서도 내심 일하느라 바쁜데 일일이 찾아 틀어주기가 힘들어 짜증이 밀려왔다. 그래, 아프니까 맞춰주자 싶다가도 적당히 좀 보지, 하는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나 보다. 화를 내고 나면 10초 안 되어 후회할 것을 알기에 꾹 누르고 하루 종일 원하는 걸 다 보여줬다.


점심 설거지를 마치고 한숨 돌릴 겸 옆에 앉아 보고 싶다던 영상을 보는데 가만 보니 제가 하고 싶은 놀잇감들이 나오는 것이 아닌가. 아이스크림 만들기, 놀이공원 가기, 케이크 만들기 같은 것들. 만들기를 좋아하는 녀석이 꼭 한 번씩 갖고 싶다고 했던 것들이 줄줄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파서 못한 것만은 아니었다. 매번 사주겠다고 공수표만 잔뜩 날리곤 했다. 특히 동네에 있는 키즈카페는 다시 꼭 가겠다고 해놓곤 간 적이 없었다.


넋을 놓고 보는 아이 옆에서 낯이 뜨거워졌다. 지금 티브이에 나오고 있는 저 모든 놀이는 사실 아프기 전에 충분히 해줄 수 있는 것이었지만 대부분 해주길 미루던 것들이다. 같이 놀자며 바짓가랑이를 붙잡은 아이에겐 늘 엄마는 일이 바쁘다며 밀어냈다. 욕망이 채워지지 않은 녀석이 그나마 그 마음을 풀 수 있는 것은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대신해주는 사람의 영상을 보는 것이었을까? 나는 그것도 모르고 우리 딸이 티브이를 너무 많이 보는 것 같아 걱정을 하고 있었다. 티브이를 많이 보게끔 해놓고, 걱정하고 있으니 어쩜 이리 한심할 수가.




이불 위에 둘이 같이 누워 꼭 끌어안아 주며 슬쩍 운을 뗐다. 다 나으면 뭐가 제일 하고 싶으냐고. 놀이동산에 제일 먼저 가고 싶단다. 지난 1월에 가서 실컷 놀았던 놀이동산에 가서(녀석은 키즈카페를 놀이동산이라고 부른다) 10번 놀고 싶다고. 나는 케이크 만들기를 하고 싶다고 덧붙인다. 우리끼리 재밌게 케이크도 만들고 만두도 만들었으면 좋겠다고. 모양이 엉망이면 어떠냐고. 우리끼리 낄낄 깔깔 재밌으면 그만이지,라고.


아이스크림 만들기, 종이로 집 만들기, 재밌는 미끄럼틀 타기, 요리 하기...


너무 사소해서 당장에라도 할 수 있는 것들이 흘러나왔다. 나는 그 말을 잊지 않고 주워 담아 마음에 저장해 두었다. 머리로는 잊을 것들도 마음에 담으면 잊지 못할 것 같아서. 상상만으로 행복했는지 안 잔다며 생떼를 쓰던 녀석도 순식간에 잠에 빠져 버리고, 그 옆에서 나는 알 수 없는 기분으로 이렇게 오늘을 또 기록한다.


잃기 전엔 소중함을 모른다는 그 흔한 말이 와닿는 요즘이다. 건강하게 잘 자라주어 별 탈 없이 보냈던 4년이란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 시간이었는지를 새삼 느낀다. 아이가 아프니 평범했던 일상이 실은 평범하지 않은 일상이었는지를 깊이 새긴다. 밥 한 그릇을 뚝딱 해치우는 것, 먹고 난 후 건강한 응가를 보는 것, 밤이 되면 뒤척임 없이 편히 잠드는 것, 그리고 사소한 놀이로 행복한 오후를 보내며 마음을 채우는 것은 너무 평범해서 평범하지 않은 것들임에 틀림없다.


아이 곁에서 며칠 밤을 지새우며 결심했다. 공수표는 이제 그만. 미루지 않고 그날 하고 싶은 것들을 꼭 하나씩은 함께 하기로. 뒷모습만 보이는 엄마 대신에 옆모습, 앞모습을 다 보이는 엄마가 되기로. 혹여나 다시 이토록 아픈 순간이 와도 티브이만 보며 대리 만족하는 우리 딸을 다시 보지 않기로.



숨소리가 고르다.

아.. 제발.. 오늘 밤은.. 무사히...



 


매거진의 이전글 제발 좀 떨어져라 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