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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녕 Apr 24. 2022

어느 화백의 그림 한 점

딸이 자는 시간은 매우 귀하고 값지다. 더 정확히 말하면 딸이 잘 때 잠들지 않는 저녁시간이 귀한 것이 맞다. 보통 딸을 재우면서 함께 잠들기 때문에 자유 시간이랄 게 거의 없기 때문이다. 오늘은 그 값지고도 값진 날이다. 새벽 6시에 일어나서 밤 9시까지 실컷 놀다가 결국 "졸려! 졸리다고!", 짜증을 섞인 말로 잠에 승복해버린 딸이 자러 들어간 지 2시간 하고도 25분이 지난 이 순간. 난 어떤 엄마들보다도 행복하다. 맥주를 그렇게 좋아하지 않아 육퇴 후 맥주 한 잔 즐기진 않지만 대신 내게 브런치가 있으니 이미 충분히 힐링이 되고도 남았다.


밀린 일이 있었다. 글쓰기 과제를 주고, 숙제로 걷은 자료인데 아이들의 이야기를 읽고 하나씩 피드백을 해주겠노라 약속을 했다. 한 줄, 두 줄 쓰다 보니 길어져 2시간 가까이 써주고 나니 이 시간이 되어버린 것.(이 이야기는 목차를 얼추 짜고 본격적으로 진행할 예정이다.) 좀 전에 부지런히 끝내고 글 한 편 쓰고 하루를 마무리하려고 아이패드를 켰다. 글이 잘 안 풀리면 그림이라도 그릴 요량으로 열어본 그림 앱엔 곯아떨어진 인생 5년 차 내 딸의 그림 수십 점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보자마자 웃음이 터지며 꼭 안아주고 싶다가 그만 이내 씁쓸해졌다. 요새 내가 제대로 봐주지 못하고 놀아주지 못해 혼자 아이패드 들고 손으로 쓱쓱 그린 그림이란 걸 너무 똑똑히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루 중 한 순간도 제대로 쉬지 않는데 너무나 바빴다. 새벽 6시에 일어나서 (이제는 한 시간 기상이 늦춰졌다.) 아침 준비를 해 놓고 출근, 퇴근 후에는 쌓인 설거지, 밀린 빨래, 그리고 걷어야 하는 옷감들을 정리하다 보면 어느덧 10시. 내일을 위해 반드시 잠들어야 하는 녀석을 달래 재우고 나면 10시 반. 일터에서 못다 한 일을 하다 책상 위에서 꾸벅꾸벅 졸다가 그만 잠들어 버리는 하루가 계속되고 있으니, 바쁘고 바쁜 틈새에서 딸과 놀아주는 일은 어느새 가장 뒤로 미뤄지게 된 것.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면서도 놀자는 말 뒤로 어느새 고무장갑을 끼고, 블록 같이 하자는 말 뒤로 어느새 청소기를 돌리거나, 혼자 그리고 있으라며 아이패드 하나 던져 주게 된 것이다.


처음이 어렵지 계속하다 보니 어쩔 수 없다는 이유로 자꾸만 반복하게 됐다. 잠시만, 잠깐만, 이것만 하고, 이것만 하면 놀아줄게,라고 꼬드기곤 이것만 하고 나면 저것도 해야 한다고 말하는 나쁜 엄마의 등 뒤를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딸은 엄마가 켜준, 앱에 손가락을 슥슥 대며 그림을 그렸겠지. 스스로 고른 붓과, 색깔로 까만 바탕에 초록 점을 툭툭 찍었겠지. 그 그림이 엄마에게 얼마나 슬프게 느껴질 줄도 모르고. 흘러내리듯 떨어지는 물방울의 끝자락이 얼마나 짠하게 느껴질 줄도 모르고. 슥슥 넘기면 끝없이 나오는 그림들에서 제 마음을 느낄 수 있다는 것도 모르고.


일에 치이고, 일상에 쫓겨 정말 중요한 것은 방치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신생아 때처럼은 아니더라도 적절한 교류와 관심은 꼭 필요한 것인데 나는 일하는 엄마라는 이유로, 오늘 낮에는 유치원에서 실컷 놀았으니 집에서는 티브이 좀 더 봐도 된다는 말도 안 되는 구실로 아이와 함께하는 시간을 너무 줄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스멀스멀 올라온다. 돈도 벌고 싶고, 글도 쓰고 싶고, 좋은 교사이고 싶으면서도 현명한 엄마이고 싶어 그렇게 스트레스받으며 아등바등 살면서도 결국 나를 먼저 생각하고야 마는 모습이 너무 이기적인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가니 오늘 잠투정으로 울고 불고 짜는 녀석에게 또 너무 냉정했던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사무친다.


매일 밤 후회하고 결심해도 다음 날 아침 후회하게 되는 무한 루트에 진입한 것만 같다. 지금은 이렇게 미안하고 안쓰럽고 짠하면서도 내일 아침이 되어 생떼를 부리면 또 너무 밉고 성가시게 느끼는, 이 모순된 감정을 언제쯤 벗어날 수 있을까. 당장 내일, 이 마음을 잘 유지해 아이에게 웃는 낯으로 말 한마디를 건넬 수 있을까.


내일 오후엔 우리 웃으며 손 맞잡고 그림 그리며 함께 행복할 수 있을까.

그럴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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