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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녕 May 12. 2022

이지경이 될 때까지 뭘 한 거야

내 몸 아끼기, 내 마음 챙기기

   도저히 버틸 수가 없었다. 이마부터 관자놀이, 그리고 양쪽 어금니까지 조이는 듯한 통증이 미치게 만들었다. 눈을 뜰 수 없었고 마침 같이 찾아온 식체 때문에 허리를 펼 수 조차 없었다. 설거지는 쌓여 가는데, 아이는 옆에서 놀아달라 칭얼대는데 밤을 새운 남편은 졸린 눈을 비비며 버티고 있는데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더 이상 내 몸은 내 것이 아니었다. 정신이 육체를 지배한다지만 나는 지배할 육체가 단 한 조각도 남아있지 않았다. 참을 수 없는 고통을 잠깐이나마 이겨낼 수 있는 방법은 하나였다. 눈을 감고 그대로 침대에 누워버리는 것.


  오전 11시 30분. 딱 30분만 자겠다며 아이도 남편도 모르쇠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2022년 5월 5일. 목요일, 연휴 첫날의 일이었다.




  사실 이런 고통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거슬러 올라가 보면 아이를 낳고 난 후, 그러니까 19년도 1월부터 시작되었다. 속이 안 좋으면 위가 더부룩하면서 동시에 조이는 듯한 두통이 동반하는 것. 처음엔 편두통으로 시작되었다가 나중엔 머리 전체를 조이고, 마지막엔 다시 편두통으로 끝나는. 일주일을 꼬박 아파야만 하는. 아세트아미노펜도 이부프로펜도 듣지 않는 어마어마한 고통을 꼬박 4년째 겪고 있는 셈이었다. 약 먹으면 낫겠지, 수액을 맞으면 낫겠지, 쉬면 낫겠지 싶어 차일피일 미루던 것이 벌써 4년째. 그 사이 약엔 내성이 생겨버렸으며 자주 가는 병원에선 대학병원에서 CT 촬영을 권했다. 어쩐지 대학병원엘 가는 순간 심각한 일이 생길 것만 같아 망설이던 차에 나는 또, 이번 달에도 아프고 만 것이다.


  서러웠다. 뭐 이렇게 약한가. 뭐 이렇게 아픈가 하고.

  짜증이 났다. 맑은 하루, 산들한 바람을 즐길 새 없이 나는 왜 주기적으로 고통을 겪어야 하나 하고.

  미안해졌다. 엄마만을 바라보며 정강이에 매달린 딸내미의 속상한 눈빛을 보고.


  도대체 무엇이 문제일까. 아직 젊은 나이, 약을 먹기에도, 입원을 하기에도 아직은 이른 나이라고 생각한 내게 도대체 무엇이 문제이기에 이렇게 아픈 순간들이 찾아오는 것일까. 생각이 꼬리를 물고 늘어졌다. 이렇게 하다가 그만 정말 심각한 상태가 되지 않을까 두려워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개 한 번 제대로 들 수 없는 고통이 찾아올 때면 불쑥불쑥 나쁜 생각들이 찾아왔다. 다른 사람들은 더 힘든 일도 아무렇지 않게 넘기는데 나는 왜 그렇지 못할까 자학도 했다. 몸이 아파 차곡차곡 쌓인 나쁜 감정이 결국 어린 딸에게 쏟아질 때면 뭐 이런 지질한 엄마가 다 있나 하고 자책도 수없이 했다. 몸이 아파 생긴 일, 몸이 괴로워 생긴 일이었다.


  침대에 누워 곰곰이 생각했다. 살아온 삶들, 걸어온 궤적들, 먹어온 것들, 만났던 사람들.

  

  작은 것에 연연하며 힘겹게 살아온 삶이었다. 특유의 섬세한 성격은 뛰어난 장점이었지만 그 때문에 많이 괴로웠다. 타인의 시선, 표정, 그리고 말 한마디 한 마디가 내 머릿속에 남아 괴로움을 줬다. 꿈에선 그토록 소리 지르길 좋아하면서도 실제론 그러지 못했다. 바보같이도 많이 삭이고 삭이다가 결국 썩어버린 감정은 이갈이나 한밤중 잠꼬대로 터져 나왔다. 올해 초 새로 맞춘 마우스피스는 어느새 깊이 홈이 파여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라면이 먹고 싶었다. TV 속 누군가가 운동 전 컵라면을 끓여 먹는 것을 보니 군침이 돌았다. 갑자기 짜증이 치밀었다. 넌 그렇게 아프고도 라면이 먹고 싶니? 체해서 며칠을 죽을 먹고서도 그렇게도 그런 것만 먹고 싶니? 화가 났다. 바보 같은 성격도, 자극적인 것만 좇는 입맛도 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머리가 조여서 아무것도 할 수 없으면서도 또 라면, 또 커피, 또 김밥을 찾는 내가 한심했다. 평소 사람들을 흉 볼 자격도 없었다. 여기 바로, 그들보다 더 어리석은 내가 있었으니까.


  기초체력이 약하면서도 운동은 싫어했고 인스턴트만 쫓아온 인생이었다. 라면, 김밥, 떡볶이, 순대, 튀김, 그리고 과자들. 다른 것은 잘 조절하면서도 먹을 것만큼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한 동안 라면 안 먹기를 실천했으나 쉽지 않아 몇 주 전부터 매일 1개씩 끓여먹던 중이었고 커피는 역시나 다시 하루에 3잔씩 꾸준히 먹고 있었던 것이다. 식후엔 과자를, 식전엔 간단히 빵을 먹으며 천천히, 조금씩, 분명히 위를 아프게 했다. 그래서 아픈 게 당연한 건데도 그 습관을 버리지 못하고 이러고 있으니 한심했다. 정말, 이 지경이 될 때까지 뭘 한 거야, 싶었다.


  40년 가까이 소위 말하는 분식에 길들여진 위가 불쌍했다. 역류성 식도염, 위염, 위경련, 그리고 복통에 구토까지 시달린 위를 자유롭게 해주고 싶었다. 몸에 좋은 것들을 챙겨 먹으며 아껴주고 싶어졌다. 지금이라도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어쩌면 50대가 되었을 때, 아니 40대가 되었을 때 분명 심각한 일이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았다. 그동안 그렇게 위를 혹사시켰다면 이제라도 토닥이고 싶은 마음이 들자,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이 떠올랐다. 맵고, 짜고, 자극적인 것들을 피하기로 결심했다. 비록 지난겨울에 시작했다 실패했지만 다시 해보기로 했다. 인생이 원래 그런 것이니까. 하다 실패하면 다시 시작해보고, 또 실패하면 다시 시작해보고 하는 것이니까.


  더불어 마음도 챙겨주기로 했다. 아이들에겐 희망을 불어넣어 주면서도 정작 내 마음은 한 번도 달래준 적 없었다. 언제나 120%의 목표를 세워두니 100% 성취해도 만족이 없었다. 늘 채찍질하는 삶, 비교하는 삶, 다른 사람들의 평에 연연하는 삶은, 마음에 구멍을 크게 만들어 버렸다. 미처 채우지 못한 채 10년이 훌쩍 지나가버렸다. 10년 동안 관계에 염증이 생기자 해결할 힘조차 없던 난 사람들을 피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살 순 없었다. 아무리 몸에 좋은 것들만 챙겨 먹는다고 하더라도 마음이 아프면 근본적인 해결이 될 수 없었다. 내 안에 남아있는 염증난 상처에 연고를 발라주고 밴드를 붙여주기로 했다.


그래야만, 앞으로는 제대로 살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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