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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녕 May 30. 2022

최후의 만찬 (1)

도시락 끝내기 D-2

드디어 2일 남았다.

겨우 이틀이 아니라 '드디어' 2일이다.


딱, 좋을 때까지만 하기로 한 것이 11개월이 지났고 이제 2일 후면 자유의 몸이 된다. 도시락 싸기의 긴 여정을 마무리하게 되면 아쉬운 마음이 클 것 같았는데 오히려 후련하고 개운한 마음이 드는 것을 보니 생각보다 꽤 진지하게 그만두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친다.


시작은 가벼웠지만 끝낼 때에는 그래도 조금은 진지하게 마무리하고 싶어 며칠 동안 메뉴를 고민했다. 그만둔다고 하여 열정이 사라진 것은 아니므로. 끝을 본다고 하여 아예 안 할 것은 아니므로.


나를 위한 끼니를 기념하는 의미로다가 뭔가 새로우면서도 익숙하면서도 먹으면 행복한 기분이 드는 그런 메뉴를,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설거지하면서, 아이를 씻기면서, 그리고 잠들기 직전의 고물고물 한 상태에서.


그런데 생각보다 별다른 게 떠오르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하고 또 생각해도, 고민하고 또 고민해도, 요리책을 들춰보아도, 유튜브를 계속 찾아보아도 늘 먹던 메뉴를 벗어나지 않았다. 3첩 반상도, 볶음밥도, 주먹밥도, 만두도 당기지 않았다. 돈가스도 카레도, 샐러드도 마찬가지. 어떤 메뉴를 보아도 탐탁지 않았다. 어쩌면 사실 마음속에선 이미 '도시락 메뉴'에 대해 생각하고 싶지 않은 것일지도 몰랐다.


메뉴 고민만 하다 주말이 끝나버렸다. 늦어도 오늘 아침엔 메뉴도, 도시락통도, 하다못해 보냉 가방도 미리 준비해 두어야 했다. 그런데 왠지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아무것도 하기 싫은 마음 끝엔 어차피 2일뿐인데, 굳이 애쓰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굳게 자리 잡고 있었던 것 같다.


선물을 줘야겠다, 고 생각한 것은 오늘 아침의 일이었다. 여느 때처럼 일찍 일어나 아이의 주먹밥을 준비하면서 불현듯- '오늘은 가볍게 가고 싶단' 생각이 스쳤다. 바리바리 싸가는 대신 가볍게, 양손에 가득 가져가는 대신 가방 하나로 끝낼 수 있게, 그렇게 가볍게. 그래서 도시락 통을 다시 들고 오지 않게, 직장에서 먹고 버릴 수 있게.


간편함. 가벼움. 그리고 손쉬움.

마침 지하철 역 앞엔 가끔 들르는 스타벅스가 있었고, 스타벅스 어플엔 미처 다 쓰지 못한 포인트 (사실 상 현금)이 남아있었다. 그렇게 맛이 있진 않지만 그래도 적당한 맛의 샌드위치. 그리고 커피 한 잔. 그 정도로면 충분했다. 가볍고, 간편했으며, 손쉽게 살 수 있고 먹을 수 있는 메뉴였으니까.


충분히 좋아하고도 남는 B.L.T. 샌드위치에 커피 한 잔을 곁들이며 점심을 마무리하니 그렇게 간편할 수 없었다. 적당히 부른 배, 썩 괜찮은 기분으로 오늘의 점심을 마쳤다. 진작에 이렇게 할 걸, 편하게 살 걸. 하는 마음이 자꾸 맴돌았다. 지난 시간들이 충분히 만족스러우나 지금 이 순간이 편하고 좋은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이제 정말 하루 남았다.

나를 위해 준비한 최후의 만찬은 무엇으로 할까, 어떤 메뉴여야 잘했다며 스스로를 토닥일 수 있을까.


행복한 고민이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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