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안녕 Jun 03. 2022

여기, 오천 원이요.

종이돈 들고 슈퍼마트에 가면

  하원 준비를 하는 중에 불현듯 '현금'을 가져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놀이터에서 좀 놀다가 오는 길에 아이스크림을 사주려고 했는데 그 계산을 딸내미가 직접 해보면 어떨까 싶은 마음에서다. 어느 순간부터 카드로 '지지 지직' 마그네틱 긁히는 소리만, 아니 이제는 그 마저도 들리지 않는 모습만 보여주다 보니 '돈'의 개념을 아예 모르는 것 같아서 생각난 김에 해보기로 마음먹었다. 마침, 집에는 지난번에 쓰고 남은 돈 5,000원 남짓이 봉투에 담겨 있었다.


  실로 오랜만에 보는 율곡 이이 선생님이었다. 카드 한 장이면 모든 것을 다 살 수 있는 세상, 지문 한 번만 읽히면 온라인 결제는 손쉽게 할 수 있는 세상에서 종이돈을 보니 반가운 마음까지 들었다. 아주 옛날엔 지금의 돈보다도 크기가 더 컸고, 그림도 색깔도 약간 달랐다는 것을 그리워하며 걷다 보니 어느새 유치원 앞. 이름을 부르니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신나게 논 아이가 총총 거리며 나온다.


  한참을 놀이터에서 놀고 목이 말라 왔다. 나 역시, 금요일 퇴근 직후 아이와 놀아주는 것이 고되던 참.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5,000원을 슬쩍 꺼내어 아이 앞에 보여주니 신기해서 난리다. 아마도 아주 어릴 때 빼고 이런 종이돈을 보고 만진 것은 처음이리라.

"엄마랑 같이 슈퍼마트(딸내미는 꼭 슈퍼마트라고 부른다) 가서 아이스크림 세 개 살래? 하나는 엄마, 하나는 아빠, 하나는 네 꺼! 그리고 이 돈을 계산해주신 아주머니께 직접 드려보는 거야! 어때? 재밌지 않아?"


  던진 떡밥을 냉큼 문 딸은 당장 슈퍼마트를 가자고 성화. 유모차 덜덜 끌며 마트에 도착하니 이미 몸의 절반은 밖으로 나가 있는 상태다. 아이스크림 코너로 데려가 나는 슈퍼콘, 저는 부라보콘, 아빠는 폴라포 포도맛을 하나 들곤 계산대로 향했다. 바지 주머니에 소중하게 넣어 둔 오천 원을 꺼내선 물건을 받지도 않고 냉큼 아주머니께 드리니, 아주머니는 그 끝없는 귀여움에 그만 웃으신다. 하나, 하나, 하나. 총 세 개의 아이스크림을 계산한 값이 2,700원. 남은 2,300원을 받아 다시 주머니에 넣고 나오는데 짤랑짤랑 잘랑, 동전 소리가 정겹다.


  나 어릴 적에 엄마는 언제나 오천 원, 혹은 만원 따위를 건네주며 콩나물 한 봉지, 두부 한 모 같은 자잘한 재료들을 사 오라고 시키시곤 했다. 그러면 난, 머리도 빗지 않고 세수도 하지 않은 채로 밖에 나가 미션을 무사히 완수하곤 위풍당당한 발걸음으로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그때 나는 꼭 뿌듯함을 느끼곤 했는데 첫째는 지금 먹고 있는 콩나물무침과 두부조림은 내가 사 왔기 때문에 먹을 수 있다는 근거 있는 자신감 때문이었고, 둘째는 심부름을 다녀오기만 하면 애매한 잔돈은 꼭 심부름값이 됐기 때문이었다.


  "엄마, 살살 가자. 동전이 떨어지면 어떡해?"

걱정하는 딸내미를 달래주며 집에 도착하니, 녀석은 아빠에게 달려가 자랑을 한다. 이것 봐 아빠, 내가 받은 돈이야. 하면서. 가져갔던 돈의 반토막도 안 되는 돈을 들고 신나 하는 걸 보니 어린 시절의 나와 꼭 같다. 나도 오천 원짜리 한 장보다 천 원짜리 세 장을 더 좋아했던 아이였으니.


  짐을 정리하는 사이 쨍그랑, 소리가 들린다. 300원은 저금하기로 마음먹은 녀석과 남편이 신혼 시절부터 모아 왔던 동전 저금통에 저금하는 소리다. 얼마 만에 들어보는 쨍그랑, 소리인지. 나 혼자 저만치 과거로 깊이 빨려 들어가고 있는데


 딸이 나를 부른다.


 엄마! 엄마! 아이스크림 먹자!!


  그 옛날 나와의 만남은 뒤로 한 채 손을 닦고 마루에 앉는다. 부라보콘의 하트 무늬가 마음에 든다며 히죽이는 아이 옆에 앉아 준비를 마친다. 다디단 아이스크림을 양념 삼아 나의 추억도 함께 느낄 준비를.

매거진의 이전글 잠들지 않는 법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