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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녕 Jul 27. 2022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기

오랜만에 주어진 자유시간이다. 8시 30분 즈음 잠든 녀석을 두고 서재로 들어와 책도 읽고 손편지도 좀 쓰고, 수업 준비도 할 요량이었다. 그러나 정말 하기 싫었나 보다. 보통 너무너무 하기 싫어도 억지로라도 이성의 끈을 붙잡아 20%라도 해놓곤 하는데 오늘은 정말 3시간 동안 아무것도 안 했다. 어제 새롭게 발견한 웹툰 정주행 하면서 지금까지 아무것도, 안 했다. 


스케줄러에 해야 할 일은 빼곡한데 억지로 들어야 하는 온라인 연수만 겨우 돌려놓고 무려 세 시간을 만화만 주야장천 봤다. 스트레스받을 때 푸는 나의 소소한 취미이지만서도 이렇게 아무것도 안 하고 오로지 놀기만 하고 나면 괜스레 양심이 찔려서 기분이 썩 좋지 않다. 원래는 분 단위로 시간을 쪼개어 학습지도 만들고, 연수도 듣고, 브런치에 (목표한) 글도 썼어야 하는데, 하는 생각이 계속 맴돌면서 기분이 나빠지기까지 한다.


지금도 딱, 그렇다. 게다가 커피까지 마셔서 잠도 안 오고, 오래간만에 청춘 로맨스 만화를 보다 보니 과몰입해서 더 잠이 안 온다. 이런 상황에 바로 잠을 잘라치니 부끄러운 마음이 들어 침대로 가지 못하고 있는 셈. 침대 아래에서 곤히 자고 있는 딸내미에게 좀 더 멋진 엄마가 되려면 적어도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지 않았어야 하는데, 오늘의 나는 참 한심하고 내일의 나는 참, 안쓰럽다. 


아주 어릴 적엔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뤄도 괜찮았다. 당장의 생활비를 벌어올 필요도 없었고 눈앞에 쌓인 집안일도 없었다. 누구에게나 잘 맞춰주는 성격 덕에 주변엔 나를 좋아하는 친구들만 있었기에 관계로 고통을 받은 적도 많지 않은 평화로운 삶의 연속이었다. 고로, 하루 정도 일을 미뤄도 나쁘지 않았다. 내일은 내일대로, 모레는 모레대로 평안하고 행복할 것이었으니까.


그런 '희망 회로'는 성인이 되고 나서 많이 바뀌었다. 월급이란 것을 받게 되면서 해야 할 일이 생기게 됐다. 주어진 책무를 다 해야지만 받을 수 있는 자격이 있다고 여겨 누구보다도 열심히 살았다. 연초에 받는 업무 수첩은 한 해가 끝날 때 즈음에 늘 너덜너덜해지곤 했는데 그 자체가 참 뿌듯했다. 아이를 낳고서는 더 심해졌다. 일을 미루는 순간 아이의 안전을 위협할 수 있는 경우가 많았다. 때문에 그때 그때 할 수 있는 일은 반드시 해야 했다. 내 몸이 힘들다고 응가 싼 기저귀를 갈아주지 않을 수 없고 내가 귀찮다고 아이의 이유식을 만들지 않을 수 없으니 말이다.


근 5년 간을 그렇게 체크리스트에 일정 지우는 삶을 반복하며 살다가 요새 들어 갑자기 주어지는 꽤나 긴 자유시간이 좋으면서도 부담스럽다. 왠지 알차게 보내야 할 것 같고, 뭔가를 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러다 보니 나 좋아 본 웹툰이면서도 그보다 더 유익한 '책'을 읽거나 '글'을 썼어야 할 것 같은 느낌에 죄책감(?)까지 밀려오는 것 같다. 아기 키우면서 '자유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아니까.


그러나! 지금 밀려오는 이 부정적 감정의 늪에 계속 빠져 있으면 나의 남은 '오늘'이 또 그렇게 흘러갈 수 있으니 마음을 다잡아 본다. 나는 오늘 꽤나 쉬고 싶었던 것이고, 나름 건전하게 제일 좋아하는 웹툰으로 마음을 풀어본 것이고, 그로 인해서 죽어 있던 연애 세포도 좀 살리고 내일 글도 쓰고, 일도 할 수 있는 동력을 얻게 된 것이라고 생각해보려고 한다.


오늘 하루 정도는 괜찮으니까.

오늘 해야 할 일을, 하루 정도는 미뤄도 될 만큼 열심히 살았으니까. 




글을 쓰는 와중에 내일이 되었고,

글을 마무리하는 동안 마음이 조금, 안정되었다.

따지고 보니 오늘 3시간 동안 연수도 절반 이상 들었다. 

오늘 할 일의 한 가지는 완성했구나. 장하다. 




Photo by Karim MANJRA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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