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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녕 Aug 26. 2022

나의 옛날이야기 (1)

나를 알리는 방법 : 흔하디 흔한 경험 글쓰기의 변주

선선한 봄바람이 불어오고 나른한 햇살이 졸음을 부추기는 계절, 4월이 되었다. 막 4월이 지난 교실은 어수선함과 조용함, 북적임과 차분함이 엉켜 있었다. 코로나 확진으로 격리되었다가 다시 돌아와 아직은 어색한 아이, 앞자리 친구와 친해지고 학급 분위기에 익숙해져 자신을 뽐내는 아이, 그저 묵묵히 교과서만 들여다보는 아이. 제각각의 아이들이 저마다의 생각으로 앉아있을 국어 시간. 나는 아이들에게 글 한 편을 주었다. <어느 중학생의 고백>이라는 아주 짧은 수필이었다. 한 페이지 빽빽하게 실려 있는 글을 보고 아이들은 짧거나 긴 한숨을 토해냈다.


"이거 선생님 제자가 중학교 때 쓴 글이야. 얘는 이미 졸업해서 성인이 됐는데, 허락은 받았고. 너희들에게 공개해도 된다고 해서 이렇게 가져왔어. 한 번 같이 읽어 보자."


라며 운을 띄웠다. 제자라는 말에, 중학생 때 쓴 글이란 말에 엎어졌던 아이들도 조금씩 반응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림없지. 따뜻한 봄날에 글을 읽는 국어 수업은 수면제나 다름없다는 법. 이런저런 반응들을 짐짓 무시한 채, 끝에 앉은 아이까지 모두 받았을 때 한 두 명을 지목했고 지목당한 아이들은 아주 잠깐, 놀라더니 이내 글에 몰입해 읽어 주기 시작했다. 떨리는 목소리는 교실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나는 눈으로는 아이들을 바라보고, 귀로는 소리를 들으며 교실을 돌아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여름방학이 지나고 나서였던 것 같다. 2학기가 되어 같이 밥을 먹으려고 하는데 윤경이가 갑자기 나를 피하기 시작했다. 과학실을 갈 때도, 음악실을 갈 때도 나를 피하고 심지어 내 옆을 지나면서도 모른 척하더니, 다른 친구들과 웃으며 걸어가기까지 했다. 영문을 몰랐던 나는, 계속 윤경이에게 매달렸다. "윤경아 왜 그래?"라고 물으면 윤경이는 그냥 나를 씹고 지나갔다. 그때, 윤경이와의 관계를 정리했어야 했다. 하지만 중학교 1학년 때 처음 사귄 친구가 너무 소중했던 나는 바보같이, 윤경에게 전화까지 해서 그 이유를 물어봤다. 그랬더니 윤경이는 나에게 "너는 이기적이야."라고 말하며 더 이상 나랑 놀고 싶지 않다고 했다. 이기적인 이유는 내가 방학 때 한 번도 먼저 연락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고 했다.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이유였고, 사실 윤경이가 나 아닌 다른 아이들과 놀고 싶었던 것 같은데, 그 당시에는 내가 잘못했다고 생각했다. 어리석게도.
  중학교 1학년 2학기. 여자아이들의 관계는 이미 결정되어 있다. 그때 새로운 친구를 사귀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보다도 더 힘든 일이란 것을 아는 사람들은 알 것이다. 결국 당시 윤경이 아닌 다른 친구는 주변에 없었기에 나는 2학기 때부터 왕따 아닌 왕따가 되어버렸다. 한 달 남짓 혼자 다니는 그 시간이 지옥 같았다. 나는 왜 윤경이에게 미련을 버리지 못했을까? 2학기 내내 미련을 가지며 윤경이의 눈치를 보며 살았다. 그래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사과하고 싶은 마음에 쓴 편지를, 윤경이와 그리고 윤경이 친구들이 돌려보며 웃는 모습을 본 날, 나의 마지막 남은 "우정"까지 날아가 버렸다. 그리고 생각했다. 다시는 친구에게 모든 마음을 주지 않겠다고.  
  물론 그 이후 나는 좋은 친구들을 만났고 지금까지도 우정을 유지하고 있지만 그날 일을 통해서 진짜 우정이란 무엇인지를 다시 생각하게 됐다. 건강한 우정은 기울어지지 않는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어느 한쪽으로 추가 기울어진다면 그것은 건강한 관계가 아니다. 진정한 친구라면 연락이 자주 닿지 않아도, 그래서 자주 만나지 못하더라도 마음을 통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때문에 혹시나 나처럼 관계에 힘듦을 느끼고 있는 친구들이 있다면 꼭 말해주고 싶다. 무엇보다 네가 소중하다. 그리고 네 곁에서 너를 이유 없이 공격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너에게 소중하지 않은 사람이다. 너의 가장 소중한 친구는, 너를 이유 없이 공격하는 사람이 아니라 너를 있는 그대로 믿어주는 사람이다,라고.            
                                                                                    - 어느 중학생의 고백 -


길고 긴 글이 마침표를 향해 달려가다 드디어 "그대로 믿어주는 사람이다,라고."라는 문장에 도착하자마자 아이들은 고개를 들어 서로를 바라보았다. 적막을 깨줄 필요가 있었다.


"글쓴이는 어떤 사람 같아?"


소심해요, 착해요, 바보 같아요, 지질해요, 호구예요, 날 것 그대로의 말이 교실 안에 둥둥 떠다니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자신의 어린 시절과 비슷한, 혹은 제 친구와 비슷한 글쓴이를 보고 이런저런 감정을 느낀 것 같았다. 나는 부유하는 말들을 하나도 거르지 않고 칠판에 그대로 적어 주었다. 가운데 '글쓴이'라고 써 주고, 가지를 뻗어 아이들의 작은 목소리 하나하나를 다 적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생각이 모이자, 다음 질문을 건넸다.


"음, 그러면 글쓴이는 어떻게 성장했을까? 지금은 성인이 됐을 텐데 어떤 어른이 됐을까? 글쓴이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혹시 있어?"


질문이 끝나자마자 아이들은 손을 들어야 한다는 것도 잊은 채 홀린 듯이 생각을 쏟아냈다. 좋은 어른이요, 착한 어른이요, 누군가를 도와주고 있을 것 같아요, 라며 제 나름대로 '글쓴이'의 모습을 상상했고 어린 시절 친구에게 상처받았던 글쓴이를 위로해 주었다. 괜찮아요, 고생했어요, 라며. 역시 나는 그 따뜻한 말 한마디를 놓치지 않고 칠판에 하나씩, 하나씩 기록해 주었다. 중간중간 적당히 고개를 끄덕여 주면서. 그러면 아이들은 신이 나서 초롱초롱한 눈빛을 담아 더 많은 말을 쏟아 냈다.


칠판에 우리의 감정과 생각이 한가득 적혀 있을 때 즈음, 나는 말없이 교탁 앞에 서서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시끌벅적하던 교실은 갑자기 조용해졌고 영문을 모르는 아이들의 시선은 학습지에서 칠판으로, 칠판에서 다시 나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20명의 눈동자가 모두 나에게 꽂힌 순간, 그 순간이 꼭 필요했다. 모두가 나에게 집중할 그때가 최고의 타이밍이었기 때문이다.


"글쓴이는 말이야...."


적당히 뜸을 들이자 아이들은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다. 얼른 말해주세요, 현기증이 날 것 같아요, 하는 표정으로 나를 응시하는 아이들을 보며


"글쓴이는 바로, 너희들 앞에 있어."


라고 말 하자 눈치 빠른 아이들은 헉! 하며 놀라고, 말 뜻을 이해하지 못한 아이들이 고개를 돌리며 그 의미를 파악할 때 마지막 한 방을 날렸다.


"윤경이와 싸우고 왕따 아닌 왕따로 지냈던 글쓴이, 그 사람이 바로 쌤이야. 너희들 앞에 있는 나."


3분 정도. 딱 3분 정도는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모두 놀랐을 것이고 예상도 하지 못했을 테니까. 아이들은 뒤통수를 맞은 것 같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기도 하고,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고개를 갸우뚱하기도 하며, 말없이 나를 쳐다보기도 했다. 그 눈빛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토끼눈이 되어 나를 쳐다보는 아이들의 눈빛, 뭐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 눈빛, 이런 반전을 기획했던 나 조차도 소름 돋게 만드는 눈빛을.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아무도 엎어져 있지 않았다. 다시 볼 수 없을 집중력으로 모두 나를 쳐다보았다. 그러면 난 아이들 한 명 한 명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나의 옛날이야기를. 중학교 1학년 때, 친한 친구와 사이가 멀어지고 왕따가 되어 우울한 2학기를 보내게 됐으며, 사과 편지를 돌려 보던 것을 목격해 우정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는 이야기가 주였다. 물론 약간의 각색을 하긴 했지만 100% 내 경험이었다. 아직도 그 시절을 생각하면 마음이 저릿한.


내 어린 시절을 들은 아이들은 세상에 둘도 없는 따뜻한 마음을 제각각 보내주었다. 그럼 난 그 마음을 받아 용기를 내어 꼭 이렇게 말했다.


쌤도 지금은 이렇게 너희들 앞에 서있지만 너희 나이 때에는 한 없이 작고 소극적인 사람이었어. 친구 문제로 힘들 때도 있었지. 그런데 그 순간들이 시간 흐르듯 지나더라. 그러니 괜찮아. 다 잘 지나갈 거야. 나를 봐. 나도 이렇게 잘 지내고 있잖아. 그러니 괜찮아. 꼭 이렇게 말해주고 싶었어.


그러면 아이들의 마음이 조금씩 열리는 것이 보였다. 언제고 똑같았다. 내 앞에 서 있는 선생님도 사실은 힘든 시절을 겪었고, 이겨냈던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됐을 때, 아니 더 솔직히 이야기하면 선생님도 똑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느끼는 것 같았다. 그러면 굳게 닫혀 있던 마음이 서서히 풀리곤 했다.


나는 그때를 놓치지 않고 뒷장을 넘기게 했다. <어느 중학생의 고백>은 이제 수십 년 전의 내가 아니라 '너희들'이 되어야 한다는 말을 덧붙이면서 선생님이 솔직히 너희들 앞에서 내 이야기를 꺼내 놓은 것처럼 너희도 너희의 이야기를 솔직하게 적어줘,라고 힘주어 말하면 아이들은 사뭇 진지해졌다.


그리고 천천히, 조금씩, 연필 소리가 들리곤 했다.

작은 종이 한 장엔 한 글자, 한 글자씩 저마다의 삶이 기록되기 시작했다. 그것은 때로는 시였다가, 때로는 수필이기도 했다. 형식은 중요하지 않았다. 제 이야기를 돌아보며 쓴다는 것 자체가 의미 있는 일이었다.


지난 17년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실패하지 않았던, 흔하디 흔한 경험 글쓰기 활동을 변형한 <나의 옛날이야기> 수업 시나리오다.





추신: 쓰다보니 길어졌네요. 이 후 아이들과의 이야기는 다음 시간에 연재 됩니다. :-) <어느 중학생의 고백>은 실제 분량보다 축약했고요. 등장인물은 당연히 모두 가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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