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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녕 Aug 28. 2022

나의 옛날이야기 (2)

정말 진심을 다해 적으면 

서툴지만 진심이 담긴 글은 마음을 움직이기에 충분했다. 내 고백을 들은 후 아이들의 글은 훨씬 깊어졌다. 뾰족했던 연필심이 뭉툭해질 정도로 손에 힘을 꽉 주어 글을 써 내려간 아이들 중 몇몇은 종이를 더 달라고 손을 들기도 했다. 그러면 나는 그 모습이 참 기특하고 예뻐서 얼른 달려가 학습지 한 장을 더 주곤 했다. 다 채울 필요는 없어, 쓰고 싶은 만큼만, 이란 말을 꼭 더해서.


물론 태생적으로 글쓰기에 대한 두려움이 가득해서, 혹은 초등학교 때의 강렬한 경험으로 인해 A4 용지의 1/3도, 아니 사실 한 줄을 쓰는 것조차 힘들어하는 아이들도 있었다.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그 아이들에게는 천천히 자신을 들여다보라고 말했다. 쓸 게 없는 게 아니라 차분하게 생각할 기회가 없었을 거라고, 한 바닥을 가득 채울 필요가 없으니 곰곰이 생각해 보라고, 힘주어 말했다. 모든 아이들이 같을 수 없기에 결과물도 다를 수 있음을 인정하기로 했다. 


꼬박 한 시간이 흘러 종 치기 5분 전. 짐짓 엄숙한 말로, 아이들에게 말을 건넸다. 


지금 열심히 쓰고 있는 모습이 무척 감동적이네. 그냥 쓰면서 들어. 선생님은 너희들 글을 걷어 가서 하나하나 다 읽어 볼 거야. 그리고 쌤이 할 수 있는 한 열심히 피드백을 해줄 거야. 그리고 절대로 비밀로 할 거야. 너희하고 나 둘만 아는 비밀 말이야. 누구에게도 공개하지 않아. 약속할게.


공수표가 아니었다. 뱉은 말을 지켜야만 한다는 것쯤은 당연히 알고 있었다. 학교가 그랬다. 나보다 어린아이들 앞에서 절대 권력을 내세울 것 같지만 실상 가장 모범적이고 가장 올바른 행동을 해야만 묘한 믿음이 쌓였다. 아이들은 귀신같이 알았다. 이 선생님이 약속을 지키는 사람인가 아닌가, 내 글을 읽어본 사람인가 아닌가, 그래서 믿을만한 사람인가 아닌가. 인생에서 잊을 수 없는 은사님까진 아니어도 믿을만한 어른은 되고 싶었다. 부러 힘을 주어 다시 한번 강조했다. 꼭, 다 읽어볼 거야. 진짜야. 그러니 솔직하게 써 줘. 부탁할게.


그렇게 여섯 개의 반을 돌고 나니 내 앞엔 120장의 종이가 쌓여있었다. 아니, 120명의 아이들이 살아 숨 쉬고 있었다. 한 장 한 장을 넘길 때마다 1학년 1반 1번이 아니라, 1학년 2반 21번이 아니라 글을 쓴 아이가 보였다. 마치 내 옆에서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만 같았다. 허투루 읽고 싶지 않았다. 맞춤법을 교정해주기 위해 들었던 빨간펜은 어느새 교정부호가 아닌 '감상 후기'를 적고 있었다. "OO아. 그런 일이 있었구나. 정말 힘들었을 것 같아. 네 글을 보니 그때 네 마음이 느껴져서 쌤도 뭔가 마음이 아프다..."라는 식으로 이어진 피드백은 멈출 줄을 몰랐다. 엄지 손가락과 중지 손가락이 무척 아팠지만 끝까지 적어 주었다. 손가락이 덜덜 떨릴 때까지. 


그래야 마음이 편했다. 어쩌면 제 치부가 될 수 있는 이야기를, 어쩌면 교무실에서 가십거리처럼 흩어질 수 있는 이야기를 나를 믿고 오롯이 담아준 아이들에게 보일 수 있는 최소한의 예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한 반 당 20명의 글을 다 읽고 나면 꼬박 3시간이 걸렸다. 공강 시간, 새벽 시간, 그리고 아이가 잠든 시간을 틈타 꾸준히 읽고, 써주었다. 마음이 오고 간 자리엔 빨간색과 검은색 글씨가 가득했다. 


<어느 중학생의 고백>을 읽고 난 후 자신의 초등학교 시절 인간관계를 쓴 아이들이 제일 많았는데 고작 14살밖에 되지 않은 아이들은 초등학교를 거쳐 오며 많은 상처를 주고받으며 살아오고 있었다. 갑자기 왕따가 되어버리거나 갑자기 왕따를 주도하기도 했다. 잘못인 것을 알면서 용기 있게 말하지 못해 방관을 하며 그 시절을 사무치게 후회하기도 하고, 자신을 괴롭힌 아이를 잊지 못해 두고두고 복수를 하고 싶다고 이를 갈기도 했다. 때론 겉으론 절대 상처받을 것 같지 않은 녀석이 거칠게 말하는 자신의 행동 때문에 친구들에게 소외받아 힘들었던 시절을 적기도 했는데, 국어 선생님께 유일하게 제 이야기를 털어놓았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가끔 어디 가서 속 시원하게 말할 수 없는 자신의 가정사를 쓰는 아이들도 있었다. 엄마와 아빠의 다툼, 그리고 이혼. 같이 살지 않지만 보고 싶은 엄마, 혹은 아빠에 대한 감정을 담담하게 적은 글을 볼 때면 괜스레 마음 한편이 아려왔다. 선생이기 전에 아이를 키우는 엄마로서 그 녀석이 어린 나이에 감당해야 했을 힘든 일들이 자꾸 떠올라서 힘들었다. 그런 글엔 꼭 고맙다고 덧붙여 주었다. 고마워, 이런 이야기를 나에게 해줘서. 


어떤 아이들은 '코로나 시절의 자신'에 대해 미친 듯이 적기도 했다. 5학년. 코로나19로 원격수업을 할 때에 수업에 참여는 안 하고 하루 종일 자다가 엄마에게 들켜 밀린 숙제를 겨우 했다거나 700시간 넘게 게임만 했던 적이 있다거나 하는 이야기들은 보다 보면 웃음이 났다. 어째 원격수업에서의 모습은 중1이든, 중3이든, 초5든, 초6이든 다 똑같았다. 2020년에 만났던 중3도, 2021년에 만났던 중1도 원격 수업 중에는 그렇게 소환사의 협곡(리그 오브 레전드의 공간(?) 중 하나란다. 수업 중에 가끔 그곳에 가있는 친구를 내게 고발한 적이 있어 알게 됐다.)에 가서 다른 방랑자를 기다리는 것일까. 


몸은 아니 정확히 손가락은 무척 아프고 힘들었지만 빼곡한 피드백이 적혀 있는 종이를 다시 돌려줄 때면 그렇게 뿌듯할 수 없었다. 너희들의 글을 읽고 감동받았어, 몇몇 군데 부족한 부분이 보이지만, 너희들은 충분히 잘하고 있어, 라는 말을 곁들이며 아이들의 글을 한 명 한 명의 이름을 부르면서 나누어 주었다. 그러면 녀석들은 제 글엔 어떤 이야기가 적혀 있을까 궁금해하며 조심스럽게 종이를 받아갔다. 분량의 차이가 있긴 했지만 아예 적지 않은 아이는 없었다. 마스크를 써서 그들의 표정을 정확히 알진 못해 아쉽지만 적어도 그 순간 우리는 같은 감정이지 않았을까 싶다. 


그렇게 고생스러운 빨간펜 피드백이 끝나면 아이들에게 조언해 준 부분을 참고해서 스스로 고쳐볼 수 있는 시간을 꼭 주었다.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이나 새로운 아이디어를 본 아이들은 새로운 종이에 더 나은 이야기를 적었다. 글을 고쳐가며 마음이 조금 더 단단해지길 바라는, 아픔이 조금은 지워지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교실을 순회하며 열심히 쓰는 아이들을 주욱 둘러보곤 했다. 글을 읽은 후라 조금 다르게 보였다. 말썽꾸러기가 아니라 아픈 사연이 있는 아이였고, 뼛속부터 외향적인 게 아니라 적응을 위해 성격을 바꾼 것이었으며, 최근에 전학을 와 학교 생활이 두렵기도 한 열네 살들이었다. 


종이 한 장으로 그들과 나 사이엔 말할 수 없는 비밀이란 게 하나 생기게 되었다. 그 덕분에 나는 1학년 아이들 삶의 한 장면을 들여다볼 수 있었으며, 그들만의 사정을 알게 되자 이해할 수 있는 폭이 더 깊고 넓어졌다. 말로는 다 할 수 없는 비밀이 글로 기록되는 순간, 우리는 말하지 않아도 통할 수 있는 사이로 한 걸음 나아간 것만 같았다. 


글로 소통한 4월의 끝자락.

나는 열넷을 지나고 있는 아이들과 조금씩 '래포'를 쌓아갈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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