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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녕 Sep 02. 2022

짧게 씌여진 시

두 줄이 주는 파격과 감동

칠판에 '시'라고 적자마자

아이들의 야유가 들려왔다.

몸을 돌려 그들을 응시하자

짧고 긴 탄식이 마스크 밖으로 새어 나왔다.

시란 그런 것이었다.

그저 글자만 보아도

한숨이 터져 나오는

그런 것.



10년 동안 국어를 가르치며 느낀 게 있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시'를 싫어한다는 것. 그것도 아주 진심으로.


어려워서 싫은 것인지, 싫어서 어려운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10명 중 9명은 시를 싫어했다. 읽고 해석하는 것도 어려운데 시를 쓰게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기도 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국어 교사인 나도 시를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다. 어릴 적 배웠던 해석 위주의 수업 때문이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 행간의 의미를 충분히 생각하고, 시인의 삶이나 작품의 배경을 깊이 알아야 이해할 수 있는, 시적 허용으로 가득한 시가, 소설보다는 훨씬 이해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이해가 안 되니 가르치기 어려웠고, 그러다 보니 자꾸 피하게 됐다.




시를 즐길 수는 없을까? 적어도 나를 만난 아이들이 '시'로 생각을 표현할 수 없을까?


고민하던 내 앞에 한 권의 책이 등장했다. 바로 하상욱 작가의 <서울시>. 2014년인가 2015년에 처음 봤던 시집인데 작가 특유의 엉뚱하고 재치 있는 시선이 매력적인 작품이 가득했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을까?', '맞아, 맞아, 그렇지!' 하며 공감하다 문득 '이거, 우리 애들하고도 한 번 해볼 수 있겠는데?' 싶은 마음이 들었다. 무엇보다 <서울시>에 수록된 시 모두가 길이가 굉장히 짧은 데다 소재가 모두 '주변에서 볼 수 있는 것'이라는 점이 좋았기 때문이다.


길이가 길고, 어려운 시어가 쓰인 원래의 시를 비틀어 버린 시. 두 줄, 길어야 네 줄밖에 되지 않는 분량에 특유의 재기 발랄할 시선이 담긴 시는 아이들의 흥미를 끌어당기기 충분했다. 마음이 움직였으면 바로 실행에 옮기는 것이 맞았다. 새 하얀 피피티 슬라이드를 그의 시로 채우기 시작했다. 수 십 편의 작품 중 마음에 드는 것 10개 정도를 추려 슬라이드에 옮겨 적었다. 보통의 시가 제목이 가장 나오는 것과 달리 <서울시>의 시는 제목이 가장 나중에 나오는 것을 포착해, 퀴즈 형식으로 수업 자료를 만들었다. 시의 본문은 모두 공개하고 분위기 있게 낭송해 준 후, 제목을 맞춰보라고 독려하기로 한 것.


반응은 무척이나 뜨거웠다. 원래도 퀴즈라면 흥분하는 아이들에게 '간식'을 걸며 승부욕을 자극하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알듯 말듯한 제목을 맞추는 게 무척이나 흥미로웠던 모양이다. 분명 이렇게 보면 A라는 제목이 되고, 저렇게 보면 B라는 제목이 될 수 있는 유연함도 아이들에겐 재미로 느껴졌던 것 같다. 한바탕 집중해서 시 제목 맞추기를 하고 나면, 아이들은 꽤 유쾌하게 웃으며 참여하고 있단 것을 스스로 깨달았다. 분명, 처음에 '시'라는 글자면 보아도 토할 듯이 싫어하며 인상을 찡그리던 자신이 어느새 그 죽일 놈의 '시' 제목을 맞추기 위해 혈안이 되어있다는 것을 알아챌 때 즈음이면, 굳게 닫힌 마음의 문도 슬쩍, 풀려 있곤 했다.


나는, 항상 그 타이밍을 귀신같이 알아채고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갔다. 어? 생각보다 어렵지 않네? 재밌네? 시가 딱딱한 게 아니었네? 하는 생각이 드는 그 순간이! 바로 최적의 타이밍이었기 때문이다. 미리 준비한 A4용지 반 쪽짜리 학습지를 나누어 주며 말했다. (A4 한쪽은 압박이 된다. 반 쪽이 주는 여유로움과 편안함은 이미 입증된 진리다!)


자, 지금부터는 너희들이 한 번 써보자.


그러면서 꼭 이런저런 설명을 덧붙여 주었다. 작가도 거창한 소재로 시를 쓰지 않았다고, 다 쓴 치약이나, 월요일이나, 맛집 탐방이나, 수학과 같이 모두가 한 번쯤은 경험한 것들을 새롭게 보았다고. 그러니 너희들도 중학생의 시선으로 바라본 일상의 것들을 새롭게 표현해보자고. 소재는 어떤 것이든 된다고. 연필, 책상, 지우개, 필통, 마스크... 모두가 다 글감이라고.


아이들은 제 이름 석자를 학습지에 적고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어디 나도 한 번?이라는 마음이었을 수도 있고, 그쯤이야 쉽지! 하는 마음이었을 수도 있다. 내가 좋았던 것은 열네 살의 아이들이 주변을 탐색하고, 일상을 돌이켜 보며 깊이 사색하는 그 모습, 그 진지함이었다. 한 시간 남짓 시를 쓰는 시간만큼은 누구도 떠들지 않고 열심히 시를 쓰려고 노력했다. 사각사각, 슥슥- 교실에 조용히 속삭이듯 퍼지는 그 소리가 참 좋았다. 뭔가를 깊이 생각하고 고민하고 쓰려고 노력하는 그 자체로, 아이들은 이미 작가였다.




수십 장의 작품이 모두 걷히면 나는 온 힘을 다해 모든 시를 다 읽었다. 그리곤 아무리 힘들어도 시간이 없어도 모든 아이들의 작품을 수업 피피티에 옮겨 적었다. 내용을 적고, 제목과 지은이는 부러 가려두었다. 다음 시간에 시를 보여주며 공유하기 위해선 이 정도의 노력은 반드시 필요했다. 대충 40개에서 50개의 작품이 모이면 몇 번이고 읽어보며 작품과 아이를 연결 지어 기억하려고 노력했다. 언제나 믿음이 중요한 법이다. 나를 믿어주는 선생님, 약속을 지키는 선생님은 실력이 뛰어난 선생님을 앞서는 무언가를 반드시 얻게 마련이었다.


그다음 시간에도 그냥 수업을 시작하진 않았다. 꼭 한 번의 임팩트는 주었다.

오늘은 뭐해요?라고 물으며 나를 반기는 아이들을 뒤로하고 칠판에 'ㅅㅂㅍ'라고 적으면 웅성웅성거리는 소리가 꼭 들려왔다. 초성을 보는 순간 저들이 자주 사용한 비속어 생각에 키득키득거릴 때, 글자를 완성해 '시발 표'를 한다고 말한 후, 피피티를 띄워 모든 아이들의 시를 공개하면 우리는 제목과 지은이를 맞추며 무척이나 행복했다. 우리는 킬킬거리고 낄낄거리다, 하하하하 웃으며 책상을 팍팍 치며 뒤로 넘어갈 듯 자지러지기도 하면서 즐기듯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한 시간을 보내고 나면 아이들은 뿌듯한 얼굴이었다. 제 작품이 나왔다는 것도 좋지만 무엇보다 자신이 쓴 시의 제목을 가장 어렵게 맞췄다는 사실에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나는 어떤 것이든 좋았다. 부끄럽다고 하더라도 선생님과 친구들이 다 보는 가운데 제 작품이 공개된다는 것은 무척 좋은 경험이었을 것이다. 누구도 빠지지 않고 실린 덕에 '나는 못 했다'는 자책이 나올 수 없었고, 유난히 잘 쓴 작품을 보며 친구의 또 다른 매력을 알 수밖에 없었다.


나는, 알 수 있었다. 세상에 이렇게 잘 쓴 시는 또 없을 거야, 이 작품을 쓴 사람에게 새로운 매력을 느꼈어, 정말 잘했다, 고 말하면 어느새 속으로 제 작품이 나오길 기대하는 아이들의 눈빛을. 그리고 그 말 끝에 제 시가 나오면 너무 기뻐하는 그 마음을. 그리고 15년부터 지금까지 이 수업을 통해 치유받은 내 마음까지도.




물론 2시간의 수업을 통해 아이들이 시인이 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이 시간에 즐겁게 놀이하듯 수업을 했다고 해서 윤동주 시인의 <자화상>을 쉽게 이해하는 것은 또 다른 일일 것이다. 하지만 상관없다. 내가 원했던 것은 시인이 되고, 혹은 어려운 시를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시를 즐기는 경험을 주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어떤 것이든 지레 겁을 내지 않고 거부하지 않는 열린 마음을 갖게 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만난 아이들 중에서는 이 수업을 통해 가끔 시를 쓸지도 모를 일이다. 속상한 날, 기쁜 날, 허무한 날, 울적한 날, 아니면 그냥 아무런 이유가 없는 날에 제 마음을 들여다보며 제 주변을 들여다보며 시를 쓸 지로 모른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수많은 일을 겪은 후, 제 마음을 표현할 수 있는 또 하나의 방법을 얻어간다면, 그런 아이가 단 한 명이라도 있다면 그저 그것으로 만족한다. 나를 지킬 수 있는 무기 하나가 생겼다면, 그것이 종이와 연필만 있으면 충분한 시 쓰기라면 더할 나위 없겠다.


그래서, 난 아이들에게 지금도 시를 쓰게 한다.

짧게 씌여진 시를.


 



* 아이들의 시 몇 개를 옮겨 봅니다.



니가 뭔데 나를 아프게 해

니가 뭔데 나를 울게 만들어

쬐끄만게


                                            - 레고 -




야, 너 노크하는 방법 모르지


                                         - 생리통 -




너에게

닿기를


                                        - 윗 선반 -




거뭇거뭇

뻑뻑뻑

낑낑 낑낑

뽀득뽀득

설거지를 해도 되겠네


                                      - 교복 마이 -




보이는 대로 말하라면서

진실을 말하라면서

진짜로 말하면

왜 혼나는 거야


                                    - 나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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