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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녕 Sep 06. 2022

과거의 나에게 부치는 <인생 사용 설명서>

이슬아, <부지런한 사랑>의 오마주

글쓰기 활동은 언제나 글감과의 전쟁이다. 워낙 글쓰기 자체를 싫어하는 아이들을 (10년 전에도 그랬고, 20년 전에도 그랬다. 글쓰기를 싫어하는 유전자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휘어잡을 수 있는 글감을 찾느냐 못 찾느냐에 따라 그날 수업의 질이 달라졌다. 흔히들 칠판에 흰 분필로 적는 '우정, 가족, 시험, 학교'와 같은 평범한 글감으로 자유롭게 생각해서 글을 쓰게 해서 수준 높은 결과물이 나온다는 것은 허상일 뿐이다. 썩 괜찮은 결과물을 위해선 평범한 소재도 보다 흥미 있게, 재밌게 소개해 줄 수 있어야 했다.


수업에 욕심이 생길수록, 경력이 쌓일수록, 아이들의 글을 읽는 재미가 깊어질수록 글감을 찾는데 더욱 집중했다. 나는 나이가 먹어 가는데 내가 만나는 아이들의 나이는 늘 열넷, 열다섯, 열여섯이므로 그들을 유혹할 수 있는 방법을 수없이 고민했다. 어떻게 하면 질풍노도의 10대를 끌어들일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열네 살 남자아이, 열여섯 여자아이들이 게임보다도, 틱톡보다도, 유튜브보다도 글쓰기를 더 좋아하게 할 수 있을까.


두 시간씩 연이어 진행하는 <나도 작가다> 수업을 앞두고 수업 계획을 짤 때 즈음 이슬아의 <부지런한 사랑>을 짬짬이 읽고 있었다. 어쩐지 내가 꼭 해보고 싶은, 그저 부러운 삶을 사는 그녀는 이미 전국 각지에게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을 모아 글방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 책은 수년간 글방을 운영하며 겪었던 경험, 생각 등을 모아 정리한 에세이였다. 그녀의 글솜씨도 좋거니와 매 페이지에 나오는 이야기가 마음을 울려 넘어가는 종이가 아까웠던 차에 <인생 사용 설명서>라는 꼭지가 눈에 들어왔다.


매주 마감을 앞둔 기자처럼 매주 화요일만 되면 눈에 불을 켜고 글감을 찾던 내게는 구세주 같았다. <인생 사용 설명서>란 그런 것이었다. 10대 언저리를 살고 있는 아이들 스스로, 자신의 삶의 돌아보며 과거의 자신에게 혹은 자신과 비슷한 삶을 살 후배들에게 해주는 조언을 적는 것. 책에 실린 몇몇의 예시 글만 봐도 무척이나 흥미로웠다. 앞 날을 예측해 보는 것은 막연해 힘들지만 내가 지나온 인생에 대해 충고해주는 것은 어렵지 않다. 아니, 사실은 더 좋아한다. "라떼는 말이야~"가 괜히 나온 말은 아닐터다. 심지어 다섯 살 밖에 되지 않은 우리 딸도 한 살 어린 동생에게는 이래라, 저래라 가르쳐 주는 것을 보면 말 다했다.


그녀의 제자들처럼 나 또한 <인생 사용 설명서>를 적어 학습지에 넣을까 하다 그만두었다. 무엇보다 글에서 느껴질 세대 차이를 감당하기가 힘들 것 같았다. 대신 <부지런한 사랑>에 실린 글 중 두 편을 함께 읽어 본 후 글을 써보기로 했다. 두 편의 글이 꽤나 재미있어서 생판 모르는 남의 글임에도 아이들은 몰입해 주었다. 비슷한 또래의 글은 순식간에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힘이 있다. (출처를 밝히고 책을 보여 주면 아이들은 더욱 집중한다.)


칠판에 <인생 사용 설명서>라고 적고 큼큼, 목을 가다듬은 후 이야기를 시작했다.


살아온 세월이 적다 하여 깊이가 얕은 것은 아닌 것 같다, 인생을 살아보면 좋은 일도 있지만 나쁜 일도 있더라, 이불 킥 하며 지우고 싶은 순간도 있지만 두고두고 기억하고 싶은 순간도 있는 게 당연하다. 자, 그러면 과거의 너에게 (혹은 후배에게) 어떤 말을 해주고 싶을까? 고민해서 적어보자. 솔직하게. 솔직한 글은 멋진 글보다 천 배 이상의 감동을 준다.


대략, 이런 내용.  




아이들은 꽤 진지하게 작성했다. 제 과거를 아는 친구와 키득키득 거리기도 하고 때로는 묵직해진 얼굴로 고개를 푹 숙이며 과거의 자신에게 해주고 싶은 말을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속도의 차이가 있을 뿐, 깊이의 차이는 없었다. 분량의 차이는 있을 뿐, 정성의 차이는 없었다. 국어 수행평가가 아니므로 짧게 썼다고 타박할 일은 아니었다. 글쓰기는 즐거워야지 오래 할 수 있으므로 순회를 하면서도 손가락으로 제 글을 가리는 아이들의 글은 일부러 들춰보지 않았다. 가린다는 것은 아직 준비가 안됐다는 것이다. 설익은 마음을 함부로 판단했다가 그르치기는 싫었다. 마음의 속도가 다를 뿐이라고 생각했다.


20명의 아이 중 10명 가까이 발표를 원했다. 워낙 개인적인 이야기가 많이 나올 것 같아서 한 두 명 있을까 말까 했는데 "발표할 사람~?"이라는 말끝에 번쩍 들어 올린 손이 반가웠다. 시키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중학교는 1시간이 45분인 것이 아쉬운 것은 처음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아이들은 한순간도 놓치지 않고 집중해 주었다. 그 순간을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어 한 작품을 옮겨 본다.



<과거의 소연이에게>

1. 제발 그 거지 같은 바지 좀 버려. 나중에 엄청 후회할 거야

2. 학원은 다니되 한 번쯤은 꼭 째봐. 뒷감당은 미래의 네가 하겠지? 선생님한테 무지 혼나겠지만 좋은 경험이 될 거야.

3. 영어학원은 제발 다니지 마. 물론 지금까지도 다니고 있지만 그게 너의 초등학교 시절 전부가 될 수도 있어. 아마 학원에 가느라 친구들과 어울리지도 못하고 사회성이 떨어져서 친구를 못 사귀게 될 거야. 그래도 좋은 경험이 됐으니까 어느 정도 배우고 끊어. 알파벳 정도만 알면 돼.

4. SNS 하지 마 그거 정말 큰 흑역사야.

5. 초등학교 6학년 때 좋은 추억 많이 쌓일 거야. 그러니까 기대해도 좋아.

6. 중학교 배정받은 날 선생님이 영화 틀어주시거든? 그때 애들이랑 폰 하지 말고 영화에 집중하거나 선생님한테 가서 사진도 찍고 놀아. 안 그러면 많이 후회할 거야.


너희와 함께한 이야기를 글로 쓰고 있다고 하니 많은 아이들이 공개를 원했다. 다 싣지 못하는 게 아쉽다. 제 글을 발표도 하고, 공개도 하고 싶어 하는 녀석들의 용기가 새삼 부럽다.




흔히, 아이들이 뭘 알겠느냐고 한다. 친구로, 가족 관계로 힘든 일을 겪어도 힘든 것은 그 순간뿐이라고 말한다. 시간이 지나면 다 해결될 거라고, 어른이 되면 다 잊힐 것이라고 말한다. 그뿐이면 좋게. 앞으로 살 날이 구만리나 남았는데 그 정도에 힘들어하면 이 험난한 세상을 어떻게 살겠느냐고 훈계가 이어지기도 한다. 그러다 결국 과거에 얽매이지 말고 '미래'를 꿈꾸면서 '현재'를 살아가는 멋진 청소년이 되라고 한다.


나도 다를 바 없었다. 매년 아침 조종례 시간에 했던 말이다. 언제까지 그렇게 할 거야? 도대체 너는 지금 몇 살인데 아직도 애처럼 굴어? 정신 좀 차려. 앞으로 커서 뭐 하려고 그래?


허나, 나의 물음은 잘못되었다. 과거가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사람은 미래를 꿈꾸기 어렵다. 현재를 제대로 살라 쳐도 마치 갯벌에 빠진 발을 빼내려고 하면 할수록 더 깊이 빠져드는 것처럼 과거에 멈춰있게 된다. 생각이란 것은 가위로 딱 잘라 버린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 인생엔 '편집점'이 없다.


그런 우리에게 글쓰기는 묘한 치유의 힘을 보여준다. 사실은 절대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을 알면서 과거의 나에게 보내는 조언을 진심을 담아 적어보면서 우리는 머릿속에 둥둥 떠다니는 과거의 잔상을 떠나보낼 준비를 한다. 생각을 적는다는 것 자체가 치유가 된다. 드러내는 순간 그것은 실수가 아니라, 지우고 싶은 과거가 아니라 그저 삶의 과정 중 하나일 뿐이다. 백 마디 잔소리보다 한 줄의 글에 힘이 실려 과거를 떨치고 현재를 살게 된다. 한 아이가 이렇게 썼다.


"나는 과거의 나도 있는 그대로 사랑하겠다. 물론 힘든 일도 많고, 괴롭기도 하고, 때로는 실수도 하겠지만 그것들을 통해서 배울 수 있는 것도 분명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깨달음은 역시나 현장에 있다.

교과서 밖의 글엔 언제나 감동이 있다.




14년이란 세월 동안 제각각 상처와 기쁨과 절망과 즐거움을 겪어온 아이들이 그 두 시간으로 어떤 감정을 느꼈을지 궁금하다. 적어도 과거를 그저 덮어두지 않고 스스로 바라보며 건강한 현재를, 행복한 미래를 살 수 있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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