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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녕 Sep 22. 2022

오글거려도 괜찮아

너에게 난, 나에게 넌

중학교에 근무한 지 10년. 문득문득 아이들이 서로에게 하는 말을 들어보면 둘이 친구가 맞나 싶을 때가 있다. 남학생, 여학생 상관없이 친하냐고 물어보면 "저희 안 친해요"가 바로 튀어나오고, 둘 중 하나가 고자질이라도 하면 교무실을 나가면서 "이 미친 XX가! ㅋㅋㅋ"가 자동으로 나오며, 심지어 선생님이 앞에 있어도 서로에게 "존 X", "씨X"을 서슴지 않는다. 유행하는 비속어가 무엇인지만 다를 뿐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친할수록 거칠게 대하는 문화는 변하지 않았다. 뭐, 나도 돌이켜 보면 친밀함을 느끼는 친구일수록 더 장난도 심하게 쳤던 것 같다. 그러다 가끔 삐지고, 싸우고, 화해하기를 반복하곤 했지만.


말 습관을 고쳐주겠다는 거창한 목표가 있었던 것은 아니나, 좋아하는 사람에게 살가운 말을 해주면 어떨까? 하는 생각 정도는 갖고 있었다. 마침 '시와 친해지기'와 관련된 수업이 생각났다. 도서관에 널려 있지만 아무도 보지 않는 시집 70권과 하얀 종이, 그리고 연필만 있다면 충분히 가능한 수업이기에 시작하기 어렵지 않았다. 국어교사로서 아이들을 사로잡을 수 있는 말솜씨가 가장 중요한 준비물! 중1 정도는 말로 휘어잡을 자신이 있었으니 내심 기대가 됐다.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먼저, 장소는 도서관으로 한다. (미리 사서 선생님께 양해를 구하고 시집을 뭉텅이로 마련해 놓는 것은 필수) 그다음으로 자리는 반드시 '친한 친구들'과 앉으라고 설명해 준다. 보통 중1은 "어디에 앉아요?"라고 자주 물어보는데 지정해주는 것보다는 자유롭게 앉게 하는 게 좋다. 홀로 남는 아이가 있어도 어쩔 수 없다. 안되면 3인이 짝을 지어주면 되니 최대한 아이들 스스로 짝을 선택할 수 있게끔 하는 게 좋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오글거리는 상황'을 연출해 주는 것이다.


"자. 모두 준비됐지? 그럼 이제 세상 오글거리는 걸 할 거야. 자. 이제 선생님이 딱 1분의 시간을 줄게. 그동안 내 옆에 앉은 친구의 눈을 봐. 그리고 검지 손가락만 들어 서로 맞대는 거야. ET처럼(참고로 요새 아이들은 ET를 모를 수 있으므로... 시범을 보여주는 것도 좋다)! 오케이? 그리고 서로를 관찰하며 느껴봐. 너에게 난, 나에게 넌 어떤 존재였는지~!"


이 말이 끝나면 모두들 "우어 어어어 어, 우우우우우우우, 시러요오오오오오오, 하기 시러요요요오오오오, 그냥 문제 풀어요오오오오오, 우웨에에에엑" 같은 반응들이 쏟아져 나온다. 그러나! 절대로 굴복해서는 안된다. 이 산을 넘어가는 것이 이 수업의 큰 포인트이다! 짐짓 진지한 목소리로 꼭 덧붙인다.


"네 곁에 있는 친구, 짝꿍, 친한 사람에게 말로 다 하지 못한 이야기를 전하는 시간이야. 쌤은 말 한 마디, 글 한 줄의 힘을 믿어. 자! 해 보자!"


그리고 정확히 1분을 잰다. 시작! 소리와 함께 아이들은 서로 보며 풉풉 하며 웃기도 하고, 고개를 돌리기도 하며, 눈이 아닌 인중을 보기도 한다. 그러면 나는 이미 예상했다는 듯이 "인중 말고 눈!", "손끝이 떨어지면 1분 추가!"라며 엄포를 놓는다. 순회를 하기보다 앞에서 전체를 지켜보면 그 모습 또한 귀엽다. 1분이 생각보다 길다는 것을 모르는 아이들은 20초 정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언제 끝나요?"라고 물어본다. 한 번도 그러지 않은 적이 없다. 오글거림을 견디기 힘든 10대의 몸부림을 곁에서 지켜보면 은근히 재미있다. 수업이란 틀 안에서 아이들을 괴롭힐(?) 수 있어 짜릿하다.


어느새 1분이 지나고 벨이 울리면 아이들은 휴~, 살았다, 라는 말과 함께 손을 뗀다. 그리고 저마다 투덜투덜, 소곤소곤, 이야기를 나눈다. 정말 오글거려, 대박이야, 하면서. (도대체 뭐가 대박(?)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러면 또 내가 등장해야 한다. 이제는 무겁게 옮겨 놓은 시집을 볼 차례라고 말하며 소개를 해준다. 1분 동안 관찰하며 느낀 감정을 잘 표현할 수 있는 시 구절을 찾아 옮겨보고 그 구절을 고른 이유를 적어보자고. 내 앞에 혹은 옆에 있는 친구의 어떤 점을 어떻게 시로 표현해 볼 것인지 고민하고 찾아 적어보자고. 그리곤 20분 정도의 시간을 주면 아이들은 생각보다 진지하게 활동에 임한다. 단 한 명도 자는 아이가 없었다. 적어도 7년 동안은 그랬다. 오히려 제시된 시집이 제한적이어서 아쉬워하거나, 수 차례 고민을 하며 시구를 고르는 아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어떻게 하면 더 잘 써줄까, 어떻게 하면 더 내 마음을 잘 전달할 수 있을까. 게임만 한다던, 유튜브만 한다던 아이들이 이렇게 무언가에 골몰하는 모습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모든 아이들이 작성을 마치면 발표다. 발표할 때에는 미리 꼭 이야기한다.

"오늘은 특별히 모든 사람들이 발표를 할 거야. 지은이가 발표하면, 지은이의 짝꿍도 이어서^^"


이 수업의 목적은 잘하는 한 사람의 모범 답안을 듣는 것이 아니라 한 학급에서 1년 가까이 함께 지내온 서로에 대한 생각을 나누는 시간이므로 꼭 모두에게 발표를 시키는 것이 좋다. 그러면 남은 30분가량을 아이들의 발표를 들으며 보내면 되는 것이다. 어쩜 그렇게 잘 고르고 잘 표현했는지는 모르겠지만 1학기에 함께 했던 3반 아이들의 발표는 꽤 인상 깊다. 21명의 아이 중 두 명의 남학생이 발표를 하고 들으며 눈물까지 보였는데 그 모습을 본 다른 아이들도 뭔가 뭉클, 느끼는 것이 있었던 것 같다.


이 두 남학생의 글을 소개한다.


시 제목:첫사랑

시 구절: 세월이 약이 되어 주었지만 울음이 웃음이 되었지만 웃다가도 눈물이 나는 건 웬일일까요?

이유: 건우는 항상 밝고 행복한 아이지만 속이 여린 친구여서 걱정되고 미안한 친구이다. 그리고 건우가 요즘 심적으로도 뭔가 위축되어 있고 10년 지기 친구로서 건우의 현재 심정을 아는데 이 시 구절을 건우가 듣고 공감하면서 힘내 주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답글


시 제목:실직

시 구절:오랜 상처를 만지듯 내손은 가만가만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네.

이유: 내가 힘들 때 준희가 항상 먼저 오고 항상 말 걸어주고 힘들 때마다 도와줘서 너무 고맙다.


분명 오글거리는 이 멘트를 듣고 둘은 눈물을 흘리고 끌어안았다. 10년 지기의 우정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둘 사이에서 오고 갔음이 분명하다.


또 한 여학생의 글도 인상적이다.


시 구절: 좁디좁은 이 세계 어디에도 둥지를 틀 곳이 없었던 새를 보았습니다.

그만큼 커다란 날개를 가진 자였습니다.

이유: 이 좁디좁은 세상에 유하라는 이름은 많지만 키가 좀 작고 헤어롤을 쓰고 내 친구인 유하는 하나밖에 없고 이렇게 좋은 친구를 발견한 것은 정말 행운인 것 같고 커다란 날개로 나의 빈 친구 자리를 크게 채워준 것 같다.


그날 우리는 도서관에서 무척이나 뭉클했다.

애들이 싫어하는 오글거림이 가득한 그곳에서 우리는 울고 웃으며 행복했다.




정해준 친구가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친구, 소중한 존재에게 해주고 싶은 말을 고르고 고르는 것은 분명 특별한 경험일 테다. 제 안에 있는 어휘로는 부족하지만 시집 안에는 풍부한 표현이 있으니 그것을 활용하면 분명 좋은 글이 나올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은 그 어떤 이유보다도 곁에 있어 주어 고마운 친구에게 하고 싶은 속 마음을 '시'라는 틀을 빌려 마음껏 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어릴 적엔 고마워, 사랑해, 좋아해라는 말을 달고 살다가 나이가 들면서부터 그런 말을 안 하게 되는 우리 아이들의 마음속에는 사실 오글거리다 못해 닭살이 돋아 손발이 사라지게끔 하는 따뜻한 말이 가득 숨 쉬고 있는 것 같다. 다만, 요새 분위기가 그렇듯, 10대라는 시기가 그렇듯, 쉽사리 그런 마음을 표현하기 어려워서 그럴 뿐.


수업을 마무리하면서 생각해 본다.


국어 교사인 나는, 어떤 말을 아이들에게 해줄 수 있을까. 어떤 시를 옮겨 줄 수 있을까. 어떤 마음을 담아 글로 표현할 수 있을까.


그 마음만큼은 좀 더 오글거려도 괜찮다.

그래도 괜찮을 것이다.






덧 1: '시와 친해지기' 수업은 15년도 1정 연수에서 들었던 송승훈 선생님의 수업을 참고하여 진행했다. <꿈꾸는 국어수업>, <함께 읽기는 힘이 세다>는 책을 집필하셨다.


덧 2: 당시 3반 아이들에게 띄운 시가 있는데 기억이 나질 않는다. 이래서 기록이 중요하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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