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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녕 Oct 17. 2022

말할 수 없는 비밀

두근, 두근, 두근.


몇 번이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누가 보면 어쩌지, 들키면 어쩌지, 그러면 뭐라고 하지? 걷잡을 수 없을 정도의 걱정과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불안을 억눌러가면서 손에 들고 있는 팔찌를 꼭 쥐었다. 마치 원래부터 내 것이었던 것처럼.


아무도 없는 방에 들어왔다. 언니와 나, 그리고 엄마, 아빠가 며칠을 묵고 가려고 싸 놓은 짐들이 덩그러니 있었다. 정리를 잘하는 엄마가 알아챌 수 없어야 했다. 이 짐, 누가 건드렸니?라는 말이 나오면 모든 것은 수포로 돌아갈 터였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해내야 한다는 중압감에 이미 수차례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돌렸다.


모두가 다른 곳에 정신이 팔려있는 사이, 이 방에 들어와, 저 가방에 넣으면 돼, 자연스럽게 나가면 돼, 그러면 끝이야. 수 차례 되뇌며 기회를 엿보았다. 언니와 팔찌의 주인공은 추석 특집 만화영화에 혼이 뺏겨있고 어른들은 살짝 오른 취기에 서로의 과거를 들춰내느라 여념이 없는 사이. 나는 이미 점찍어둔 가방에, 몰래 들고 온 팔찌를 깊숙이 찔러 넣었다.


성공했다는 짜릿함이 온몸을 휩쓸고 지나갔다. 이대로 집에 간다면 그 팔찌는 내 것이 될 예정이었다. 그리고 몇 시간 후. 그것은 온전히 내 것이 되었다.


최초의 절도였다.






"선생님, 진짜 귀여웠네요? ㅋㅋㅋ"


적막을 깬 건 평소 엉뚱한 생각으로 수업을 좌지우지하는 초아. 눈치 빠른 녀석은 글을 읽자마자 글 속의 주인공이 어린 시절의 나였음을 알아차린 것이었다. 빠른 인정이 필요했다. 맞아, 아홉 살 때의 선생님이야, 라며 글 속의 사건을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해 주기로 했다. 이건 너희에게 처음 이야기하는 건데, 라는 단서는 잊지 않은 채.



실은 그랬다. 아홉 살 때,  최초로 사촌 동생의 팔찌를 훔쳤던 기억이 있다. 추석 연휴, 오랜만에 찾아간 큰집에서 두 살 아래 동생과 놀던 중 여태껏 본 적 없는 예쁜 팔찌를 보니 문득 가져가고 싶은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달라고 하면 주지 않을 것이란 확신, 엄마에게 말하면 언니가 되어서 뭐하는 것이냐고 혼날 것 같다는 예측이 강해지자 더더욱 팔찌에 대한 욕망이 치솟아 올랐다. 고작 아홉 살의 절제력으로 그 '욕망'을 누르기엔 부족했다. 가져가지 않을 고민 대신 어떻게 하면 가질 수 있을지를 궁리한 끝에 그 팔찌는 내 것이 되었다. 어느 순간 팔찌는 사라졌지만 '절도'의 기억은 지금까지 그 누구도 모르는 비밀로 남아 있었다.



말할 수 없는 비밀을 글로 써서 수업 준비를 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아니 솔직히 이야기하면 매 순간 엄청난 저항감을 느꼈다. 아주 어릴 적의 일이긴 하나 부끄러운 것이 첫 번째 이유였고, 이런 글을 쓰고 공개하는 게 교육적으로 의미가 있는 것인가가 두 번째 이유였으며, 아이들을 설득할 수 있을 건인가가 마지막 고민이었다. 며칠을 고민하며 결국 학습지의 마지막 문장에 마침표를 넣은 순간 묘한 쾌감을 느꼈다. 수십 년 간 입밖에 꺼내지 않았던 이야기를 나 스스로 꺼내자, 약간의 후련함 따위를 느꼈던 것 같다. '대나무 숲'이 여전히 존재하는 이유가 있는 듯싶었다. 이 마음을 아이들과 함께 느끼고 싶었다. 분명, 우리는 같은 감정을 공유하며 행복해질 수 있을 터였다.



솔직하고도 어쩐지 귀여운(?) 나의 이야기를 들은 아이들에게 말했다. 세상 살다 보면 진짜 친한 친구나 가족에게도 미처 말하지 못한 비밀 같은 거 하나쯤은 있지 않냐고. 말을 하는 것 자체로 두렵기도 하고, 혹시나 이 비밀이 새어나갈까 불안하기도 하고, 또 이런 생각을 했다는 것 자체로 미칠 것 같아서 마음속 깊은 곳 저 어디엔가 묻어둔 비밀, 있지 않느냐고. 그러면 아이들은 저마다의 방법으로 자신의 마음밭 깊은 곳 어디엔가 감추어둔 비밀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말할 수 없었던, 말 하기엔 너무나도 하찮거나, 너무나도 크거나, 너무나도 나쁜, 저마다의 비밀을. 그렇게 골똘히 생각을 하고 있을 찰나를 노리며 학습지를 한 장씩 나누어 주며 덧붙였다.


"어쩌면 마음속에 간직한 비밀을 종이에 적는 것만으로도 치유가 되기도 하는 것 같아. 너희들에게 처음 털어놓은 덕에 이 비밀이 더 이상 나를 힘들게 하지 않거든. 그러니까, 너희도 한 번 적어볼래? 너희들의 진짜 비밀 말이야."


아이들은 받아 든 학습지를 만지작 거리며 망설였다. 정말 써도 될까, 저 사람 믿어도 될까, 안 보여준다면서 누군가 보는 것은 아닐까, 내 비밀이 전교에 떠돌아다니진 않을까. 학교에서 쓴 글이란 게 그렇지 않은가. 선생님들이란 다 똑같지 않은가. 발표를 하고 싶지 않아도 분위기를 몰아 내 글을 발표해야 하는 억지스러운 순간이 연출된다면 정말 최악이지 않을까, 하는 고민들이 교실을 둥둥 떠다니는 게 뻔히 보였다. 당연한 일. 이미 6년 동안 당할 대로 당한 아이들에겐 분명한 믿음이 필요했다. 준비한 쓰레기통을 꺼내 보여주며 두 번이고 세 번이고 힘을 주어 말했다.


"너희들이 쓴 글은 절대 공개되지도하지도 않아. 당연히 발표는 누구도 하지 않지. 오늘만큼은 절대로 공개하지 않을 거야. 너희들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나는 교실을 돌아다니지 않을 것이며 모든 아이들이 글을 마치는 순간 스스로 갈기갈기 찢어 이 쓰레기 통에 넣어 버릴 거야."


찢는다는 말에 충격을 받은 아이들 앞을 손수 만든 쓰레기통을 보여 주며 돌아다녔다. 괴롭히던 비밀을 털어놓고 곱게 간직할 필요는 없으니, 다 쓰면 찢어 버려도 된다고 말하니 웅성거림이 잦아들지 않는다. 진짜 찢어요?라고 물으면 당연하지!라고 답하고, 혹시 선생님이 조각 맞춰 보는 거 아녜요?라고 물으면 그럴 에너지는 없어,라고 받아치며 돌아다니자 슬슬, 대부분의 아이들의 마음이 움직인 것 같았다. 무엇보다 '학습지'를 찢는 것이 금기라고 알고 살아온 아이들에게 '찢기를 허하는' 행동 자체가 해방처럼 느껴졌던 것도 같다.


모든 준비는 끝났다. 이제는 말한 대로 나누어 준 종이를 채울 아이들을 기다리기만 하면 되었다. 혹시나 눈이 마주치면 불편할까 싶어 천장만을 바라보았다. 팔짱을 끼고 천장과 창밖을 바라보며 이따금씩 아이들을 독려했다. 괜찮아, 진짜 아무도 볼 수 없을 거야, 괜찮아, 오늘 털어놓으면 넌 조금 더 후련해지고, 조금 더 편안해질 거야,라고.


교실은 조용했고, 사각사각사각, 연필 움직이는 소리만이 가득했다. 아이들의 모습을 감독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오늘은 아무도 졸지 않고, 딴짓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종이 한쪽에 가득 제 이야기를 꾹꾹 눌러 담고 있다는 것을.






잠시 쉬고 돌아온 교실은 열기로 가득했다. 어떤 아이들은 발표를 하고 싶어 좀이 쑤시는 듯했지만 그들의 요구를 들어줄 생각이 없었다. 한 사람이라도 비밀을 발표하게 된다면 변질될 테니까. 책상 위엔 뒤집어진 종이 한 장과 잔뜩 쌓인 지우개 가루, 뭉툭해진 연필, 얼른 찢어버리고 싶은 욕망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자, 이제부터 찢자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아이들은 제 앞에 놓인 종이를 들고 좍좍, 죽죽, 북북, 찢어버리기 시작했다. 그 소리가 어찌나 경쾌하고 시원한지 마치 음악시간 같았다. 더 이상 찢을 종이가 없을 때까지 찢고 찢었다. 어쩌면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일탈. 교실 안에서 펼쳐진 우리들의 유희.


충분한 시간이 흐르고 난 후 쓰레기통을 들고 교실을 돌았다. 파쇄기가 필요 없을 정도로 잘게 잘라진 종이를 모아 쓰레기 통에 스스로 넣으라고 말했다. 이야~ 너 한 번 잘 잘랐다, 완전 능력자네~ 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여태껏 학습지에 작은 낙서 하나만 있어도 혼나던 녀석들이 오늘만큼은 찢어서 칭찬을 받고 있었다. 자, 이제 이걸 쓰레기통에 버리는 순간 널 힘들게 했던 '비밀'은 끝이야. 이젠 개운해지는 거야, 라며 두 어번을 돌자, 20개의 비밀이 모두 모였다. 한 때는 나를 너무 힘들게 했던 고통스러운 그 일이 이제는 너무 작아 쥘 수조차 없는 티끌이 되어버린 것을 모두 함께 보았다.


수업이 끝나고 난 후, 쓰레기통에 잔뜩 담긴 '비밀'을 들고 교무실로 향했다. 파쇄기에 넣어 이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지게 해주고 싶었다. 파쇄 버튼을 누르고 머지않아

우리들의 비밀은 소멸되었다. 






몇 달이 지난 지금도 나는 결코 그들의 비밀을 한 글자도 알지 못한다. 진심을 다해 보지 않았고, 볼 생각도 없었기 때문이다.  다만 그날 그때, 그 순간 아이들의  생각이 궁금하다. 녀석들은 비밀을 적으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또 종이를 갈기갈기 찢으면서 어떤 기분이었을까.  제 앞에 놓인 종이 조각들을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제 손으로 적고 제 손으로 찢은 다음에 쓰레기통에 한 조각도 남기지 않고 담을 때 어떤 마음이었을까? 일말의 개운함이라도 스쳤을까? 아니면 애써 숨겨놓은 일을 들춰야 해서 힘들었을까? 혹은 이제는 그 옛날의 일은 잊고 앞으로 나아갈 힘을 얻었을까?


그저 짐작만 할 뿐이다.

그저 조금이라도 편안해졌기를 바랄 뿐이다.


그건 분명히 '말할 수 없는 비밀'이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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