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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녕 Apr 29. 2023

4/28 (금): 어떤 질문도 괜찮다는 거짓말

노트북 앞에서 자꾸 딴짓을 하는 것을 보면 분명하다. 지금 나는, 되게 글을 쓰기 싫은 것이다. 보통 두 가지 이유가 있는데 재미없는 글감이거나 (혹은 글감이 제대로 떠오르지 않거나, 글이 안 풀리거나) 아니면 쓰기 싫은 내용이거나. 짐작건대 후자에 가깝다. 그러니까 이 시간이 된 지금까지도 선뜻 타자를 치지 못하는 것이다. 아마 나는 이 글을 쓰는 내내 마음이 편하지 않을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쓰기로 한다.




"선생님. 구입이 뭐예요?"


조용하게 책을 읽던 아이들은 순간 웅성대기 시작했다. 아마 채팅창이었다면 순간 ㅋㅋㅋ와 ㅎㅎㅎㅎ가 미친 듯이 올라왔을 그런 분위기. '왜 저런 질문을 할까. 정말 몰라서 하는 것일까. 아니 열네 살 중에 '구입(무언가를 사들임)'의 뜻을 모르는 애가 있을까. 장난일까. 설마, 진짜인가?' 별의별 생각이 떠돌았다. 심지어 몇 분 전엔 '길고양이'가 무엇이고, '멸종'이 무엇이냐고 묻던 녀석이다. 멸종이야 그럴 수 있지만 길고양이를 모른다는 것은 왠지 장난에 가깝다고 느꼈던 직후인지라 녀석의 질문이 곱게 들리지 않았다. 


아무 말 못 하고 멍하게 서 있는 나를 보며 녀석은 한 번 더 힘을 주어 물었다.  


"구입이 무슨 뜻이에요?"


이때다 싶은 다른 아이들이 저마다 한 마디씩을 보태기 시작했다.   


"야~ 너무 했다."

"너 그거 장난이면 하지 마."


그 와중에도 녀석은 무척 진지한 얼굴이었지만 나는 결코 믿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우리 학교가 학력이 낮다고 하더라도 '구입'이라는 단어의 뜻을 모른다는 것은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평소에 장난을 많이 치는 녀석이니까 분명 장난일 거라고 짐작하고는, 만약 그 뜻을 모른다면 선생님과 남아서 같이 국어 기초방과후 공부도 해야 한다고 으름장을 놓기까지 했다. 그러면 사실은 장난이라며, 그걸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냐며 도리어 큰 소리를 낼 것이라고 예상했던 것이다. 


예상은 아주 정확하게 빗나갔다. 질책 섞인 말을 들어도 녀석은 우물쭈물하기만 할 뿐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주변에서 와하하 웃음소리가 지나갔고 나는 장난과 진심이 섞인 잔소리를 쉴 새 없이 쏟아냈다. 한바탕 소란이 지나간 후 조용해진 틈을 타 슬쩍 자리로 찾아가 물었더니 정말 몰랐다, 고 속삭이듯 말하는 것이 아닌가. "헷갈려서요......."라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그랬던 것이 오늘 낮의 일이다. 그때는 정신없어 그냥 넘겼던 일이 문득 또렷하게 생각난 것은 거품이 잔뜩 묻은 그릇을 물에 헹구면서부터다. 설거지를 하며 하루를 돌이키는 와중에 나에게 '구입'을 묻던 녀석이 자꾸만 떠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심지어 생각을 하면 할수록 더욱 또렷해지기까지 했다. 당황하던 표정, 주춤하던 손, 그리고 약간 벌게진 얼굴말이다. 


더 신기한 것은 어이없던 내 감정은 기억이 나는데 도통 내 표정이 기억이 나질 않는다는 것. 나는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내가 어떤 표정을 지었기에 녀석의 얼굴이 그렇게 변했을까. 보지 못했던 내 표정을 역으로 상상하고 나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내가 그 순간 얼마나 잔인한 사람이었는지를, 절실히 깨닫게 됐다. 




초등학교 3학년 때의 나는 성실하고 착하지만 공부를 썩 잘하는 아이는 아니었다. 속셈학원을 다니지만 공부는 그저 그렇고 그런 아이였다. 특히 수학이 너무 싫어서 문제를 풀 때마다 심장이 두근거리던 아이. 하지만 선생님의 말씀은 잘 듣고 맡은 일은 최선을 다해서 하려고 노력하는 그런 아이이기도 했다. 그래서 굳이 따지자면 선생님께 예쁨을 받는 쪽에 서 있던 아이.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그날은 아주 어려운 시험을 보는 날이었는데 다른 과목보다도 수학 과목이 무척 어려웠던 것으로 기억한다. 특히 한 문제가 무척 어려웠는데 끙끙 거리며 억지로 풀다가 결국 말도 안 되는 답을 적어 냈던 것 같다. 제발 선생님이 내 시험지는 안 봤으면 좋겠다고 속으로 수천번을 생각했었다. 제발, 제발, 제발.. 채점은 하지 마세요, 선생님... 하며 얼마나 기도를 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야속한 선생님은 교탁에 서서 아이들의 시험지를 한 장 한 장 정성스럽게(?) 넘기기 시작하셨다. 점수를 말하지 않았지만 그의 표정에서 점수를 알 수 있었다. 잘 푼 아이에게는 미소를, 못 푼 아이에게는 찡그린 표정을 보여주셨으니까. 그러다 어느 순간 시선이 내게 머물렀다. 이미 내 심장은 밖으로 튀어나와 온 교실이 떠나갈 정도로 뛰고 있었다. 쿵쾅쿵쾅 쿵쾅쿵쾅- 내게 도착했던 것은 미소도, 찡그림도 아니었다. 단 한 마디였다. 


"바보." 


나는 아직도 그 목소리와 억양과 그날의 분위기를 잊지 못한다. 심지어 선생님의 얼굴과 표정까지도 생생하다. 하필이면 맨 앞자리에 앉아서이기도 했지만 '바보'라는 두 글자엔 열 살인 나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그의 진심이 꾹꾹 눌려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단 두 글자의 그 말에는 "네가 어떻게 그럴 수 있니?", "넌 도대체 공부를 하긴 한 거니?", "한심하다." 따위의 말들이 헝클어져 있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아마 선생님은 평소 내게 기대하는 바가 있으셨을 것이다. 그래서 짐작건대 선생님은 잘할 것이라 믿던 내 답에서 실망을 하셨을 것이고, 그 마음을 그저 '바보'라는 말로 가볍게 표현하셨을 수도 있을 것이다. 지금의 나라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열 살의 나는 그 말이 너무 큰 상처로 다가왔다. 귀갓길에 나를 뒤쫓아오며 "야! 너 이제 선생님이 바보래!"라며 놀리던 짓궂은 남자아이는 무시해 버리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미묘하게 무거웠던 선생님의 목소리, 나를 한심한 듯 쳐다보던 그 눈빛, 그리고 차갑게 굳어진 표정이 완성한 '바보'란 말은 소심하고 내성적인 열 살의 나를 무너뜨리기에 충분했다. 너무나도, 충분해 넘치고 흘렀다.


그 때문일까. 나는 그 이후에 자존감이 많이 떨어졌다. 가뜩이나 모든지 월등하게 잘하는 언니 때문에 스스로 위축되고 비교하며 살았는데 이제는 선생님께 공식적으로 인정을 받은 것이나 다름없으니 뭘 해도 잘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내가 되겠어? 난 못해,라는 생각을 자주 했다. 특히 수학 문제를 풀 때에는 심장이 많이 뛰었다. 혹시 또 틀리면 어떡하지, 혹시 또 망신을 당하면 어떡하지, 하는 생각에 많이 힘들었던 것 같다. 또 선생님을 뵙는 게 어쩐지 어려워 자꾸만 피했던 것 같다.


고작 열 살이었다.




모르는 것은 죄가 아니라고 아이들 앞에서 늘 이야기했다. 오히려 모르면서도 아는 척하는 것, 숨기는 것이 잘못된 것이라고 말하며 언제든, 어떤 질문이든 선생님은 좋다고 말했다. 질문을 하면 우리는 분명 서로 배울 수 있을 것 같아서 늘 기대가 된다며 설레발을 치기도 했다. 모르는 것을 인정하는 것. 그 자체가 얼마나 용기 있는 것이냐고 말하던 나였다.


그러면서 '구입'이라는 단어를 알지 못한다며 아이를 민망스럽게 만든 나는, 나의 초등학교 3학년 담임 선생님과 과연 얼마나 다를까? 

누가 봐도 실망한 표정을 역력히 담아 쳐다본 나는, "바보"라고 말을 뱉어낸 나의 선생님보다 더 낫다고 할 수 있을까? 

말 모르냐며 그렇게 쉬운 단어를 모를 수가 있냐면서 재차 확인을 하며 녀석의 굳어가는 표정을 알아채지 못하고 아이들 앞에서 망신을 준 내가 어쩌면 더 잔인한 선생님이 아닐까.


열네 살. 그때의 나와 겨우 네 살 차이다. 네 살은 무언가를 완벽하게 알고 있기에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 아니던가.




모를 수 있다.

우리는 누구나 어떤 것이든 모를 수 있다. 반대로 알 수도 있다. 남들보다 더 알고 있는 것이 큰 자랑이 된다고 해서, 남들보다 조금 많이 모르는 것이 큰 부끄러움이 될 이유는 없다. 또 '당연히' 알아야 하는 것도 '당연히' 해야 하는 것도 없다. 열네 살이 알아야 할 것을 모를 수 있고 오히려 스무 살이 되어서야 알아야 할 것들을 미리 알 수 있다. 세상엔 무수히 많은 사람이 있고 그 무수히 많은 사람들에겐 각자의 사연이 있을 테니까. 지금 몰랐던 것도 앞으로 알아가면 되니까. 


머리로 알면서도 실천하지 못했다. 야, 어떻게 그 단어를 모르냐, 너 너무 공부 안 하는 거 아니냐, 그러고서 네가 중학교 1학년이냐, 그래서 어떻게 공부할래, 이제 게임 그만하고 공부 좀 하자, 책 좀 읽어, 따위의 잔소리를 할 기세였다. 누구보다 소통하려고 노력한다고 스스로를 대견해했으면서도 오히려 그보다 못한 짓을 저질렀다. 설거지를 하면 할수록, 물줄기가 세 지면 세 질수록, 그릇이 깨끗해질수록 마음이 불편해졌다. 한참 동안 내리지 못했던 녀석의 오른손이 자꾸만 떠올랐다.


어쩌면 녀석은 이미 잊었을지도 모른다. 그저 국어 시간에 벌어진 아주 짧지만 부끄러운 소동이라고 생각하고 넘겼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나와 같다면 "너 진짜 몰라?"라며 추궁하듯 묻던 나를 마음속 깊이 원망하고 있을 수도 있다. 아니면 지금은 그 감정이 뭔지 모른 채 시간을 흘러 보내가 어른이 되어 문득 억울한 마음이 들 수도 있다. 마지막 그릇을 포개어 놓는 순간, 너무나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애석하게도 오늘은 금요일이다. 주말이 지나야 그를 만날 수 있다. 

날이 지나 그 아이를 학교에서 다시 만나게 되면 슬쩍 불러서 이야기하고 싶다. 선생님이 그날 너무 당황해서 그만 너에게 상처를 주는 말과 행동을 한 것 같다고. 의도치 않게 너에게 상처를 주었을 수도 있을 것 같다고. 정말 미안하다고.


부디 

나의 미숙한 언행에 

상처받지 않았기를.

무너지지 않았기를.


진심으로 바라본다. 

 



사진: Unsplash의 Artem Maltse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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