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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녕 Apr 22. 2023

4/ 19 수: 윤동주를 만나다. (2)

마음에 아로새기듯, 필사

나는 국어교사이지만, 상징이라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 참 어려웠다.

누가 나에게 “도대체 상징이 뭐예요?”라고 물어보면, 딱- 떨어지게 말할 수 없는 자신이 너무나 부끄러웠다. 너는 국어를 가르친다는 애가 그런 것 하나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고 뭐 하냐?라고, 혹은 선생님은 아는 게 뭐예요?라고 누군가가 자꾸 말하는 것만 같았다. 자꾸 위축되는 마음을 이기고 싶어 더 열심히 공부했고, 더 열심히 찾아봤다. 중학생 수준에서 이해할 수 있는 상징의 개념을, 그리고 가능한 쉽게 이해시킬 수 있는 방법을.


그중에 하나로 고른 시가 바로 윤동주의 <서시>다.

일제 강점기의 암울한 현실 속에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시집의 서문에 실었던 <서시>는 그야말로 상징의 표본, 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것을 눈에 보이는 어떤 것으로 나타내는 것이 상징이라고 하니, <서시>에 등장하는 ‘하늘’과 ‘바람’과 ‘별‘과 ‘길’이 각각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안다면 ‘상징’에 대해서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보통 <서시>는 중3이나 고1 단계에서 나오는 시이므로, 중1에게는 다소 어려울 수 있을 것 같아 본문 수업을 최대한 재밌는 퀴즈 형식으로 진행했다. 원래는 모둠을 편성하여 모둠원들이 토의를 하며 ‘하늘’의 의미, ‘별’의 의미를 탐구하는 것이 바람직한 수업이나 나의 역량 부족 및 강한 걱정(아이들이 활동에 집중하지 못하거나, 너무 어려워서 아무것도 하지 않거나, 그러다가 결국 내가 정답을 다 알려주는 일이 발생하는 것) 때문에 강의식으로 진행했다. 초성 퀴즈를 사랑하는 아이들의 성향을 활용하여 내용 이해 수업을 진행하니 나름 한 명도 졸지 않은 수업이 되었다. (정답을 맞힌 아이들에겐 도장을 찍어주는 보상까지!!)


하지만, 그대로 끝내긴 뭔가 아쉬웠다.

윤동주의 삶을 알고, 그의 시를 공부했다면, 이제는 그가 되어보는 경험을 하는 것도 좋겠다 싶었다. 그래서 준비한 것이 바로 <서시> 필사다. 그 옛날 깜지 쓰듯 시를 베껴 쓰는 것이 아니었으면 했다. 글자 하나하나에 담긴 의미, 윤동주가 담고 싶었던 그 ’ 뜻’을 아로새기며 한 글자 한 글자 옮겨 적기를 바랐다. 나도 한 번 해본 적 없는 일을 애들에게 해보라고 시키고서 이러쿵저러쿵 말하는 게 부끄러워 먼저 한 번 적어봤다. 진짜 웃긴 것이, 한 번 써보는 것뿐이었는데도 뭔가 시를 마음으로 느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규칙은 다음과 같았다.

첫째, 원고지 세로로 쓰기

둘째, 볼펜으로 쓰기

셋째, 틀리지 않기

넷째,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쓰기


특히 ‘볼펜으로 쓰기’를 가장 싫어했는데 틀릴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투덜거리는 아이들을 설득했던 것은 이 한 마디. “얘들아, 윤동주 시인은 원고지에 시를 옮겨 적을 때 수천번, 수만 번을 생각해 보고 틀리지 않으려고 노력했대. 우리도 한 번 해 보자. 정성스럽게, 그리고 신중하게. “


아, 틀렸다, 우 씨, 틀렸어, 야, 수정테이프 있냐? 와 같은 소란이 사그라들자 교실은 이내 조용해졌다. 그러면 나는 그 조용해진 틈 사이를 돌아다니면서 슬쩍슬쩍 아이들의 글을 보며 속으로 감탄했다. 평소에 글씨를 진짜 못쓰는 녀석들도 최대한 잘 쓰려고 노력하는 마음, 최대한 실수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그 마음이 예뻐서다. 너무 조용하다 싶으면 슬렁슬렁 말도 걸었다.


얘들아, 지금 너희들은 2023년을 살고 있지만, 1941년의 윤동주도 되어보는 거야. 우리가 배운 시어의 의미를 생각하면서

천천히, 차분히 적어봐.


정적을 깨는 수업 종소리에도 움직이지 않고 아이들은 끝까지 펜을 놓지 않았다. 나는 그 옆에서 소중한 쉬는 시간을 반납하여 아이들의 글을 끝까지 기다려주었다. 그것이 예의라고 생각했기에. 기다리는 와중에 한 아이가 내게 물었다. 선생님, 선생님은 왜 윤동주 시인을 좋아하세요?

뭐라 말해야 좋을까 고민이 들었다. 나는 왜 윤동주를 좋아할까, 왜 그래서 굳이 수많은 시 중에 <서시>를 골라 지금 너희들에게 필사를 시키고 있을까.

생각을 맺기도 전에 우르르 모여든 아이들이 서둘러 제출하는 종이를 받아 들고 교무실로 향했다. 노란 바구니 안에 담긴 20장의 필사 종이를 가만히 훑어보며 생각했다. 분명 누가 뭐래도 최선을 다해 꾹꾹 눌러쓴 진심이 넘쳐 흘렀다. 우열을 매기는 것이 우스워졌다.


4교시를 알리는 종이 울렸다.




나는 왜 시를 가르치는가? 아이들은 왜, 지루하고 따분한 시를 공부해야 할까?

명쾌한 답을 찾은 적은 거의 없다. 시험을 위해서, 수행평가를 위해서 자습서를 참고하여 ‘모범답안’을 판서해 주며 외워야 한다고 강조한 적이 사실은 더 많다. 부끄럽지만 그동안 내게 ‘시‘는 그저 분량이 짧기에 길어도 2시간이면 진도를 다 뺄 수 있는 갈래임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배운 아이들은 문제를 푸는 데는 어려움이 없었으나 그 시를 오롯이 느끼지는 못했으리라. 시험이 끝나고 며칠 후 물어보면 내용 하나 기억하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니까.


나도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아니, 어쩌면 오히려 더 ‘잔인한’ 문학 수업을 보내왔다. 내가 가지고 있는 문제집의 해설과 하등 다를 바 없는 (아니 어쩌면 혼자 공부하는 것보다도 더 설명을 못하는) 국어 선생님의 수업은 중학교 1학년부터 고등학교 3학년까지 쭉 이어졌고, ‘시’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만 가득 남게 했다. 애석하게도 나 역시 시와 관련된 시험 문제는 전부 외워서 푸는, 기계 같은 공부를 했다. 당연히 시험이 끝나면 그 모든 ‘감상’은 휘발되어 버리고 말았다.


시에 흥미를 느끼며 진짜 마음으로 이해하기 시작한 것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다. 조금씩 나이가 들자 그 옛날 시험을 위해 공부할 때는 보이지 않던 시의 의미가 조금씩 다가오기 시작했다. 마음의 여유가 없어 지나쳤던 시의 여백. 가장 적은 단어로 가장 깊은 의미를 드러내는 ‘시의 매력‘에 빠지자, 모든 것들이 새롭게 보였다. 김춘수의 <꽃>도, 이병기의 <낙화>도 김소월의 <진달래 꽃>도 무언가 다르게 느껴졌다. 무엇으로도 채울 수 있는 그 여백을 아이들에게도 알려 주고 싶었다. 그래서 시가 사실 지루하고 따분한 게 아니라는 것을 조금이라도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


바쁘게 살아가는 아이들이다. 여러 가지 이유로 삶에 치이고 있으며, 유튜브와 틱톡처럼 볼 것이 넘치는 세상에 책 같이 고리타분한 것들은 가까이하기 힘든 상황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끊임없이 소통을 원하는 아이들이기도 하다. 그런 아이들이 잠시나마 정신없는 세상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 시 속에 자신의 삶을 녹이며 ’ 시 여백‘에서 마음껏 노니는 시간을 갖게 된다면 더할 나위 없지 않을까. 그것은 1998년생부터 2010년 생까지 아니 사실은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어떤, 삶의 여유가 아닐까.

적어도 국어 시간만큼은 잠시 쉬어가는 시간을 주고 싶다는 마음이 나를 여기까지 이끈 것 같다.


필사를 한다고 해서 내가 원하는 방향대로 모두가 느낄 수 없다는 것쯤은 안다. 딱 한 번의 필사로, 그저 중학교 1학년 때 국어 수업 한 번으로 아이들이 삶의 여유를 찾고 자신을 돌아보고 성찰하는 경우보다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훨씬 많다는 것쯤은 당연히 알고 있다. 하지만 수업이 끝난 후 조용히 찾아와 “선생님. 국어 수업은 정말 많은 걸 배울 수 있어 좋아요.”라든가, “<서시>에 이런 의미가 담겨있는지 몰랐어요. 감동이에요.”라든가, “최대한 안 틀리려고 했는데 잘 안되네요.”라며 멋쩍게 웃는 녀석들을 볼 때면 적어도 내가 가려고 하는 방향이 맞다는 확신은 든다.


나는 왜 시를 가르치는가?

질문이 잘못되었다. 나는 가르치지 않는다. 가르침을 통해 사실은 늘 배운다. 나는 사실, 배우고 싶어서 가르치는지도 모를 일이다.




선생님은 왜 윤동주 시인을 좋아하세요?라는 질문을 다시 듣는다면, 이제는 대답할 수 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바라던 그의 마음을 좇는다면,

나 역시 교단을 떠나는 그날까지 부끄럽지 않은 선생님이 되고자 노력할 것 같아서. 아니, 사실 너희들 앞에서 매 순간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고 싶어서.



윤동주 <서시> 필사 작품. 같은 시임에도 불구하고 글쓴이에 따라 전혀 다른 느낌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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