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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녕 May 10. 2023

5/10 (수): 발췌록

조만간 글감이 될 무언가가 휘발되기 전에

핑계인가? 핑계는 아니다. 물리적으로 시간이 없었고, 지난 5월 초에 38도까지 올라갈 정도로 아팠던 것 때문이다. 겉으로 보는 것과 달리 너무나 바쁘고 정신없이 돌아가는 학교 상황 때문에 그래서 엄청나게 많은 일을 겪더라도 차분하게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이 부족한 것도 하나 더 추가해야겠다. 이래가지고서 브런치 북을 하나 발행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렇다. 지금 이 글도 글쓰기 방과 후를 하면서 애들에게 글 쓸 분위기를 만들어 주고 나도 겨우, 자리를 잡고 쓰는 중이다.


4월, 5월 많은 일이 있었고 있는 중이다. 일단 방과 후만 다섯 개를 하게 되었고 (후술 하겠지만 정신없이 흘러가는 일정에 결국 나는 병을 하나 얻게 된다.) 다문화 멘토링 사업을 시작하게 되면서 한 아이와 좋은 인연으로 프로그램을 하게 되었고, 내가 맡은 업무가 원활하게 진행되게 하기 위해서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틈만 나면 일을 하는 시간을 줄이지 않고 살고 있다. 보통 10시에서 11시에 시작되는 일은 새벽 1시가 되어야만 끝이 난다. 거기다 하나 더.  국어 수업도 의미 있게 하고 싶은 마음에 틈틈이 수업 준비를 하며, 피드백을 하며 살고 있다. 이 와중에 담임을 맡지 않게 된 것이 신의 한 수.


무튼, 그렇게 정신없이 보내는 중에도 내가 겪고 느낀 것을 날려 보내기 싫어서 곳곳에 기록을 해두었다. 다문화 학생과의 이야기, 글쓰기 동아리 이야기, 수업 중에 느낀 이야기, 그리고 남들은 잘 모르는 학교 이야기를 너무나 쓰고 싶은데 내 생각이 정리가 되지 않아 아직 시작을 하지 못하고 있다. 아마 생각해 보건대 방학이나 되어야 차분하게 생각을 가다듬을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래서- 더 잊지 전에 간략하게 그동안 내가 모아 두었던 예비 글감을 펼쳐 보이려고 한다. 이것은 완성된 글은 아니고 그전까지 있을, 중간 단계의 무언가라고 생각하면 될 듯하다.


1. 4월 말부터 1학년 아이들을 데리고 도서관에 가서 직접 책을 고르고 고른 책을 4시간 동안 읽은 후 <책 소개하기 홍보물>을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다. 벌써 5월 11일이라서 책 읽기 막바지 단계로 접어들었다. 반마다 진도가 각양각색이라서 가장 빠른 반은 이번 주 금요일에 <책 소개학 홍보물>을 만들게 된다. 책을 읽는 아이들을 관찰만 하고 나는 아무것도 안 하기가 좀 멋쩍어서 함께 책을 읽기 시작했다. 3주 간 총 3권의 책을 다 읽었다. <어린이라는 세계>, <아몬드>, <콜센터의 말>. 지금은 <그릿>와 <죽은 자의 방청소>를 읽고 있다.


2. 독서 수행평가를 명목으로 책 읽기 수업을 하다 보면 두 가지 생각을 매일 하게 된다. 먼저 첫째, 아- 글쓰기, 그리고 독서만 하면서 살고 싶다. 역시 내향적인 나는 조용하고 차분한 분위기에서  이런 걸 좋아하는 아이들과 서로 소통하는 작업을 너무 좋아한다. 아니 사랑한다. 아니, 그 말로도 표현 못한다! 그리고 둘째, 왜 똑같은 시간을 주어도 어떤 아이들은 책을 끝까지 읽고- 어떤 아이들은 끝까지 읽지 못할까. 그것을 ‘끈기’라고 한다면 그 끈기의 힘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독서가 힘든 과정이지만 완주했을 때 내면이 성장할 수 있는 강력한 방법인 만큼 교사인 내가 아이들을 이끌어 줄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3. 나는 왜 항상 내 체력을 고려하지 않고 일을 벌인 후에 나중에 그걸 수습하느라 고생을 할까. 아이들과 한 약속을 저버리는 게 너무나 미안한데 결국은 이번에도 끝까지 완주하지 못할 것 같다. 바보 같다. - 그러니까, 체력이 너무나 떨어지는 일 중독자의 이야기.


4. 도시락을 진짜 완전히 멈추기로 한다. 엄청나게 대단한 이유로 시작한 것도 엄청나게 대단한 이유로 그만두는 것은 아니지만 혼자 먹는 생활이 좋았던 만큼, 다시 급식소로 가는 마음이 살짝은 불안(?) 했는데 생각보다 아무것도 아니었다. 2021년 7월부터 시작한 도시락 싸기 2년 간의 여정. 진짜 끝. 크지 않은 급식비를 내고 건강과 여유를 찾자.


5. <어린이라는 세계>를 읽다가 일부 내용이 너무 좋아서 발췌해 본다.


 * 존댓말을 한다는 것 자체가 서열을 파악하고 어휘를 고르고 감정을 조절하는 일이다. 경험은 어른보다 적은데 책임은 어른보다 많이 져야 한다. 우리 어린이들이 어른들 보아가며 말하느라 참 고생이 많다.


* 어린이는 어른보다 작다. 그래서 어른들 눈에 잘 띄지 않는다. 큰 어른과 작은 어린이가 나란히 있다면 어른이 먼저 보일 것이다. 그런데 어린이가 어른의 반만 하다고 해서 어른의 반만큼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어린이가 아무리 작아도 한 명은 한 명이다. 하지만 어떤 어른들은 그 사실을 깜빡하는 것 같다.


* 어린이가 어른이 되려면 무엇보다도 살아남아야 하기 때문이다.


* 언제나 절망이 더 쉽다. 절망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얻을 수 있고, 무엇을 맡겨도 기꺼이 받아준다. 희망은 그 반대다. 갖기로 마음먹은 순간부터 요구하는 것이 많다. 바라는 게 있으면 가만히 있으면 안 된다고, 외면하면 안 된다고, 심지어 절망할 각오도 해야 한다고 우리를 혼낸다. 희망은 늘 절망보다 가차 없다. 그래서 우리를 걷게 한다.


* 어린이의 반응을 바라는 어른들은 왜 울릴 생각만 할까. 어린이의 직관은 무엇을 꿰뚫어 보는 신통한 능력이 아니라 있는 것을 그대로 보는 힘이다. 늘 정확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뭘 모르는 게 아니다.


6. 교사로서 가르친 아이에게 들었을 때 가장 기분 좋은 말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선생님 덕분에 국어가 재밌었어요, 선생님 덕분에 국어 교사가 꿈이 되었어요, 국어가 제일 좋아요가 아니라 “내년에 다시 저희 담임 맡아주세요.”다. 교직을 바라보는 관점이야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처럼 아이들과의 관계가 삶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사람에게 ‘담임’이 되어달라는 이야기는 꽤나 크게 다가온다. 작년에 툴툴거리기도 하고 혼도 많이 났지만, 바른 심성으로 항상 제 역할을 다 해준 아이가 어제 날 보자마자 건넨 이 한 마디에 마음이 뭉클했다. 그렇게 마음이 약해서 교사 생활 오래 하겠느냐는 걱정이 멀리서 들려온다. 그런데 바꿔 생각하면 이렇게 마음이 약해서 매일 같이 깊이 느끼고 사랑하며 한 순간도 후회 없이 보낼 수 있다. 올려 보내고 나니 그리운 우리 2학년 아이들. 내가 내년에 3학년 담임을 해서, 1학년 때 만난 녀석들 졸업까지 시키면 참 좋긴 하겠다. 진짜.


7. 학교에서 10년 정도 일을 하다 보니 어느 순간 이제 ‘부장’이라는 직급에 오를 시기가 된 듯하다. 갖고 있는 능력 대비 올라가야 할 위치가 부담되고 걱정도 된다. 당장의 일은 아니나 미래를 당겨 걱정하는 나로서는 스스로에 대한 검증이 필요하다. 과연? 내가?


8. 아, 38도가 넘는 고열과 함께 기침, 그리고 목감기가 찾아왔다. 그래서 그 좋아하는 커피를 못 마신 지 2주 정도 되었다. 목감기가 완전히 나으면 무조건 아이스 (따뜻한) 바닐라 라테 원샷이다. 진짜. 꼭.


당장 생각나는 것은 이 정도. 적어보니 별것 아닌 듯한데 그 하루하루는 꽤나 묵직하고 힘들었다. 그래도 잊지 않고 일상을 발췌하여 기록으로 남겨본다. 그래서 나 스스로에게 잠시나마 쉬는 시간을 주기로. 잠시나마 힐링을 선물하기로.


아! 위의 8개의 이야기를 조금씩 정돈해서 꼭 쓸 것이다. 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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