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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녕 Dec 15. 2023

사는 이야기 (1)

겨울입니다.

모든 계절이 저마다의 매력을 가지고 있지만 저는 겨울을 좋아합니다.

옷깃을 여미는 차갑고 시린 바람도,

갑자기 선물처럼 쏟아지는 눈도,

초록색과 빨간색이 넘실대는 연말의 그 분위기도 사랑합니다.


겨울입니다.

짧았던 가을이 가고 한 해를 마무리 짓는,

그래서 왠지 마음 한편이 저릿해지는, 그런


겨울입니다.


사는 이야기를 적는 이곳에 들어오는 것이 어찌나 힘든지요.

생각은 구만리인데 실천은 한 발짝도 떼기 힘듭니다.

겨우겨우 짬을 내어 들어오면

몇 년 전까지 부지런히 일구던 나의 이곳은 어쩐지 황량한 들판이 되어

덩그러니 남아있습니다.

싹, 갈아엎어 버릴까 싶다가도

이 것도 결국 내 것이려니 싶어 둡니다.


최근에 학년 부장을 해보는 게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받았습니다.

요지는 지금 제가 하고 있는 업무의 연장선으로서 학년부장까지

맡아서 한다면 잘 해낼 것이라는 (적어도 학교 입장에서는 안전하다는(?)) 것이었죠.

학년 부장이라. 작년에 이미 한 번 제안받아 각오는 하고 있었지만

다시금 그 이야기를 들으니 마음이 무거워집니다.

이제는 거부할 수 없는 나이라는 것도 한 몫합니다.

더 이상 “저는 그런 능력이 없어요.”라고 거부하기엔 나이가 적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떤 일을 시작할 때

수 십 번을 머릿속으로 연습해야 마음이 편합니다.

11월부터 지금까지 머릿속으로 수십 번을 상상해 봅니다.

학년 부장이 되어 아이들 앞에서 지도하는 모습을 그려봅니다.

말썽을 부리는 아이들을 다잡는 모습,

착하고 성실한 아이들을 격려하는 모습,

어쩐지 마음 한편이 우울해서 한 마디, 한 걸음 내 딛기 힘든 아이들을 다독이는 모습을

상상해 봅니다.

반은 익숙하고 반은 어색하고

반은 자신 있고 반은 자신 없어서

망설여집니다.


어찌어찌하여 마음을 다잡고 시작해 보려는데

요새 가르치고 있는 1학년이 참 예쁩니다.

처음에는 저들의 당돌함, 개념 없음, 그리고 배려 없음에 화가 나고

그래서 병도 나고, 속도 상했는데

1년이 마무리되어 가는 지금

누구보다도 나름대로 제 몫을 살아가고 있는 녀석들이 귀엽고 사랑스럽습니다.

가끔 지나가는 말로 “사랑한다.”라고 말하면 (아, 참고로 저는 사랑한다는 말을 무척이나 자주 합니다. 가르치는 아이들에게는 더더 욱요.)

오글거린다며 뒷걸음치는 녀석들을 귀애합니다.


“샘, 2학년으로 꼭 오셔야 해요.”

“2학년 담임 해 주세요.”

라며 애교 섞인 말을 하는 녀석들을 보며 생각해 봅니다.

어쩌면 내년을 함께 보내도 좋겠다고요.

그러면 저들도 나를, 나도 저들을 편하게 느끼지 않겠느냐고요.

그러면, 지금 내가 느끼는 감정을 조금 더 당당하게 표현해 줄 수 있지 않겠느냐고요.


이렇게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드는 요즘입니다.

제가 업으로 삼고 있는 일이란 게

결국은 무엇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인지라

“도대체 요새 애들 왜 그래?”라며

화를 삭이지 못하던 저도

그새, 그 짧은 1년 동안 정이 그만 담뿍 들고 말았습니다.


곧 종업입니다.

날은 더욱 추워질 게고

우리는 조금 더 친해질 겁니다.


시리도록 추운 겨울을 제가

가을보다도 사랑하는 이유는

어쩌면 조금씩 조금씩 천천히 스며드는

그래서 결국엔 마음을 다 주어버리고 마는

우리의 관계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잠들기 전에 머릿속에서 한 번 또 그려봅니다.

시간이 흘러 봄이 되고 3월입니다.

3월의 어느 날 저는 단상 위에 불려 올라갑니다.


학년 부장이든

담임이든


사랑할 마음 가득 담아 올라가겠지요.

커다란 마음 한 곳에는 여러 가지의 방을 만들어

새롭게 만날 녀석들에게 나누어줄 공간을 빗질하며

깨끗하고 단정한 마음밭을 가꾸며,

기대하고 두려워하며 실망하고 사랑하며.


그렇게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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