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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녕 Jan 01. 2024

31일과 1일의 사이에서

정리하고 계획하기


정신없이 살다 보니 연말입니다.


하필이면 12월이 제일 바쁠 때가 퇴근하고 집에 오면 쓰러지길 한 달째.

눈 떠 보니 오늘은 12월 31일. 한 해가 간다고 안녕하는 시간에 이르렀습니다. 의미를 엄청나게 중요시하는 성격도 나이가 드니 무뎌져, 시간이 흐르나 보다, 나이를 먹나 보다, 2024년이 오나 보다, 하고 무덤덤하게 지나치려다, 어쩌다 그만 제야의 종까지 듣게 됐습니다. 예년엔 11시쯤 잠들었던 것 같은데 올 해는 애는 일찍 재우고 유튜브 채널 보다가, 남편과 수다 좀 떨다가, 연말 음식 설거지 하다가 보니 이 시간입니다. 우습게도 31일의 여운이 가시지 않은, 31일이 아닌 날입니다. (시간의 구분은 실로 우습습니다. 전 아직도 2023년인데 2024년이라고 합니다.)


고무장갑 벗고 행주로 물기를 닦으며 생각합니다. 한 해가 가기 전에 그래도 글 한 편은 올리고 자자고. 남들 다 하는 한 해 마무리 글도 써보고, 남들 다 하는 새해 계획도 세워보면서 그렇게 좀 식상한 글 한 편이라도 적어 보자고요. 그 생각하며 설거지하니 잠이 점점 깹니다. 한 해를 돌아보니 잘 한 일도 있지만 못한 일도 있거든요. 못한 일 생각하다 후회가 밀려오더군요. ‘모든 경험을 나에게 득이 되게 생각하라.’는 조언을 따라 과거를 돌이켜 후회하지 않으려 노력하지만 천성이 어쩔 순 없나 봅니다. 한참을 후회하다 멈췄습니다. 돌이켜 보지 않으면 성찰이 되지 않습니다. 성찰이 없다면 발전이 없습니다. 내 앞에 거울 하나 놓고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힘이 필요합니다. 오늘, 저는 23년을 돌아보는 거울을 하나 놓아 볼까 합니다.


2023년은 대체적으로 행복했던, 그래서 평안했던 해였습니다.

먼저, 딸아이의 공이 가장 큽니다. 본격적으로 등원과 하원을 담당해야 했던 저의 템포에 맞춰 아주 이른 시간에 일어나 (6시 30분), 아주 늦은 시간에 하원 (대략 17시 30분)하는 생활을 무탈하게 잘해주었기 때문입니다. 너무나 감사하게도 우리 딸은 아침에 스스로 잘 일어납니다. 아침밥을 하는 밥솥 소리가 시끄러워도, 전날 밤 남긴 그릇을 닦느라 달그락 거리는 엄마의 설거지 소리에도 짜증 한 번 내지 않았습니다. 덕분에 1년이 편했습니다. 짠하고 안쓰러운 마음에 작년보다 밥대신 빵을, 식사 대신 간식을 많이 주었습니다. 영유아 검진 때 과체중이 나온다면 그건 80%은 제 책임일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월부터 5월까지는 잔병치레가 많았습니다. 기침을 달고 살았고 대학병원까지 갔습니다. 급성 기관지염을 의심해 간 병원도 소풍처럼 느꼈던 녀석은 자판기에서 뽑아준 음료수 하나에 해맑게 웃었습니다. 혼자 어두 컴컴한 엑스레이실에서 엑스레이를 찍어도, 엄청나게 뾰족한 바늘로 피를 뽑아도 울지 않았습니다. 아이는 심한 병은 아니었습니다만 그날 저는 열이 38도까지 올라 출근을 하지 못했습니다. 어쩌면 다행입니다. 아이가 아픈 것보다 내가 아픈 것이 낫다는 말을 부모가 된 후에 매번 실감하거든요.


업무적으로는 발전한 점이 많았습니다. 처음 해 보는 일이었지만 (자유학기제) 생각보다 매끄럽게 진행됐습니다. 많은 예산을 알뜰살뜰하게 잘 사용했고, 대부분의 보고서를 기한 내에 제출했으며, 함께 프로그램을 진행했던 선생님들도 대체적으로 만족했다고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1년 간 일을 하면서 내가 잘하는 일이 무엇인지 조금 알게 됐달까요? 저는 가르치는 일보다는 어떤 프로그램을 기획하는 것을 좋아하더라고요. 좋은 프로그램을 따와서(?) 제공해 주거나, 재밌는 프로그램을, 유의미한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실행하는 과정을 즐기는 사람이라는 걸 정확히 알게 됐습니다. 자유학기제라는 업무가 약간 그런 면이 있습니다. 덕분에 1년 동안 조금 많이 즐거웠습니다. (제가 사실 대학생 때에는 방송국에서 일하고 싶었거든요. 방송작가, 그 일이 참 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수업을 하기 전에 기획하는 게 재밌다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올 한 해는 수업에서 나름의 변화가 있었는데요. 비유와 상징을 윤동주 시인의 시로 가르치고, 문법 단원은 멘토-멘티제를 스포츠 스카우트 제도 등을 활용하여 구성해 봤습니다. 모둠을 짜서 영상도 만들어 봤고, 노트북을 100% 사용한 글쓰기 수업도 해 봤습니다. 특히 특정 반에서는 고쳐쓰기 단계에서 친구들의 글을 서로 읽어주며 피드백해 주는 단계까지 갔는데 만족도는 높았습니다. 1년 간 열심히 다양하게 시도해 보았습니다. 힘들고 정신없었지만 즐거웠습니다. 그러니까 저는 기획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것, 맞죠? 기획한 것을 펼치기 직전의 그 설렘을 사랑합니다.


육아 동지와 더욱 끈끈한 전우애가 생긴 것도 성장 중 하나입니다. 무덤덤하고 무심한 제가 육아 동지에게 눈을 돌리기 시작한 것도 올해부터입니다. 그저 미안한 일입니다. 일터에서 무척이나 섬세한 것과 다르게 집에선 매우 무심하거든요. 그런 저 때문에 고생이 많은 나의 남편과 책도 함께 읽고, 이야기도 많이 나눈 한 해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가끔은 언쟁을 벌이고, 생각이 달라 이해하기까지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우리는 전체적으로 매우 따뜻했고, 행복했다고 생각합니다. 퇴근길 만나 함께 유치원까지 걸어가는 그 15분 동안 하루의 노고를 들어주며 토닥해주는 그 시간들이 쌓여 지금을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어딜 가면 항상 내가 좋아하는 바닐라 라테 한 잔 사다 주는, 그 마음. 늘 고맙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드립커피의 매력에 빠진 한 해이기도 합니다. 항상 아침에 출근해서 따뜻한 물 한 잔 부어 커피를 내려 마십니다. 그라인더를 사긴 귀찮아 드립백을 사 먹는데 간편하고 맛있는 게 딱 취향입니다. 덕분에 매일 아침 코와 입이 즐겁습니다. 함께 일하는 동료에게 몇 번 주긴 했는데 취향이 아닌 것 같아 멈췄습니다. 취향을 존중합니다. 요새는 핸드밀, 드립퍼 등에 관심이 생깁니다. 귀차니즘을 이기고 커피를 내려 마실 수 있을까 싶지만, 일단 마음이 끌립니다. 역시, 커피는 일단 향기로 마시는 것, 맞습니다. 분명.


부끄럽지만 1년에 10권도 안 되는 책을 읽은 것 같습니다. 한 달에 한 권씩을 읽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습니다. 출퇴근길이 짧아지니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겨우겨우 짬을 내어 읽은 게 10권도 채 되지 않습니다. 그중 가장 기억나는 것은 <아몬드>와 <도둑맞은 집중력>입니다. 특히 후자는 꼭 읽어보세요. 나의 지금을 가장 잘 분석한 책입니다. 그래서 내년엔 적어도 한 달에 한 권을 읽어 보려고 합니다.


관계를 끝맺는다는 것의 후련함을 알게 됐습니다. 아주 오래전부터 마음을 괴롭히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매정하지 못해 끊지 못하고 질질 끌려 다녔습니다. 무리에서 소외될까, 왜 이렇게 예민하냐 소리 들을까 무서워 싫으면서도 아닌 척했습니다. 불편해하는 마음이 들킬까 친한 척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아니더이다. 더 이상 볼 수 없는 지경까지 마음이 떠났습니다. 만나서 “너 싫다. “고 하는 것은 못하니 스스로 마음을 끊었습니다. 연락이 오지 않은지 2년쯤 되고, 안 한 지도 2년 됩니다. 올바른 방법인지는 모르겠으나 제게는 최선입니다. 대나무숲에 털어놓고 나니 눈물이 날 정도로 후련합니다. 어떤 관계는 유지해 봤자 나만 갉아먹는 것이 있습니다. 끊어도 됩니다. 아직 미숙할 때 만난 인간관계 대부분이 그렇습니다. 나를 알게 되면 될수록 불편해지는 관계는 끊어도 됩니다. 그걸 깨달았습니다.


쓰다 보니 길어집니다.

글은 길게 쓰는 것보다 짧게 쓰는 게 어렵습니다.

이렇게 글을 길게 쓰니 말도 많을 것 같지만 사실 전 무척이나 과묵합니다. 생각은 많은데 잘 드러내지 않습니다. 그저 글로 시끄럽게 떠드는 것뿐입니다. 이렇게 쓰고 나면 마음이 한결 편해집니다. 곁에 있는 10명의 친구보다 지금 이 순간이 너무나 행복합니다. 그래서 전 내년에 좀 더 자주, 글로 시끄러울 작정입니다.


벌여 놓고 수습하지 않는 글들이 많습니다.

원래 그런 성격은 아닌데 핑계를 대자면 바빴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아프기도 했고요. 아주 잠깐 네이버 블로그로 갈까 했는데 그곳은 나의 과거를 아는 사람이 많아 선뜻 글을 쓰기 힘듭니다. 닉네임 뒤에 숨어 글 쓰기엔 브런치가 좋습니다.


무튼, 그렇습니다.

나의 2023년은 행복했고, 편안했고, 나를 새롭게 찾은 해입니다.

나의 2024년은 또 어떨지 모르겠지만, 썩 괜찮기를 바랍니다.

아니, 설사 괜찮지 않더라도 내가 잘 이겨내리라고, 슬기롭게 지날 거라고 믿습니다.


늘, 그래왔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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