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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레몬 사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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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녕 Jun 01. 2024

엔딩 크레디트

아담한 키,

귀엽고 애교 있는 얼굴, 

하지만 그에 비해 부족한 업무 실력 때문에

윗사람들에게 욕먹기 딱 좋은 후배

김현아.



괜찮은 선배가 되고 싶었다. 

왜 드라마에 나오는

그런 멋진 선배.

후배를 다독이며 챙겨주며

든든한 의지가 되는 그런 선배.



파티션 너머 빈자리가 신경 쓰여

가보면 탕비실이나

화장실이나

계단이나

가끔, 옥상에서 

울고 있던 후배이자,

희수의 신입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김현아를 희수는 참 많이도 챙겨줬다.



"저 여기 살아요."



자취하며 버티던 신입시절이

지독히도 외로웠던 희수는

마침 회사 근처에서 혼자 산다고

털어놓는 현아가 안쓰러웠다.

마음 둘 곳 없을 것 같아

자취한다는 오피스텔에

자주 찾아갔다.



한 번은 야근하고 맥주 한 잔 걸치기도 하고

한 번은 주말에 뭐 하느냐면서 함께 

쇼핑을 하기도 하고,

한 번은 본가에서 보내준

반찬이 너무 많으니 나눠 먹자 하면서

그렇게 희수는 현아를 동생처럼

생각했다.



타지 생활의 외로움을 알기에.

사람들을 만나도 사람이 만나고 싶은 

그 마음을 알기에. 



"왜 그렇게 오버하냐? 오지랖이야."



핀잔주는 우진의 말을 무시하면서도

현아 일이라면 누구보다 먼저

반응했다.

희수가 남자였다면,

둘이 사귀는 거냐며 

의심받을 정도로.




마음을 다해 아껴준

후배가 웨딩드레스를 입고

환하게 웃고 있는 모습은

상상조차 하지 않았다.

게다가 신랑이 나의 전 남자 친구이라니.

이 역시 예측한 미래에선 

전혀 없던 장면이었다. 




한 걸음 걸을 때마다

현아의 웃는 모습이 두 눈에,

현아의 웃음소리가 두 귀에

콕, 콕 박혀왔다. 

원망스럽게도 웃는 모습은

너무나 맑았고,

웃음소리는 너무나 밝았다. 



저 눈빛의 끝이 희수에게 닿을 때

현아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오면서 수십 번을 상상했다.



흔들릴까,

좌절할까,

슬퍼할까,

당황할까,

이도 저도 아니면

차라리 울고 말까.




수천번을 연습한 장면이었다.

멈추지 않을 것이었다.

드디어 희수가 연출한 

영화의 마지막 장면.

우진에겐 이미 한 방 날렸으니

현아에게도 어퍼컷 하나는 

날려주고 멋지게 퇴장하면 

되는 순간이 드디어 찾아왔다.




"얼굴 좋아 보이네?"

"어...!? 선배... 가 여길 어떻게...."



부케를 쥔 손이 흔들렸다.

오늘 아침에 꽃시장에서 

사 왔을 러넌큘러스 잎이

떨어질 듯 아슬아슬하게

움직였다.



".... 좋아? 행복해?"

"......."



현아는 말없이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희수의 등장으로 신부대기실은

찬 물을 끼얹은 듯 가라앉았다. 

현아에게 갖가지 포즈를 요구하던

사진사는 영문을 모른 채

멀뚱하게 서있었고,

현아의 친구들은 엉거주춤,

둘 사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축하는... 못해주겠고."



한참을 뜸 들이던 희수가 

입을 간신히 열어 한 마디씩 

뱉어냈다. 아니 토해냈다고

하는 편이 훨씬 맞을 것이다.



"축하.. 한다면 그건 거짓말이고.

한 가지만 말할게.

사람... 안 변해."

"....?!"




어리둥절해하는 현아에게 

해줄 수 있는 마지막 충고였다.

사람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는 것.

아마도 우진은, 절대,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

그것이 몇 년간 쌓은 우정에 대한,

희수 나름의 예의였다.

공허한 배려와 예의 끝은

지독한 허무만 남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미련한 구석이 있는 희수였다.



"자, 사진 같이 찍자. 그래도 되지?"

".... 어... 저...!"



희수는 부러 웃으며 현아 옆에 앉았다.

하얀 웨딩드레스 옆, 하얀 원피스를 입고 온

희수를 보며 다른 하객들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제야 제 할 일을 찾은 사진사는

과한 액션과 멘트로 둘의 미소를 

끌어내려고 했다. 불가능한 일에

도전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진사였다.

수십 번의 셔터를 통해 OK, 통과된

사진 속엔, 그 누구도 웃고 있지 않았다. 







영화는 끝이 났다.

드라마처럼 화끈한 복수를

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생각보다 허무했다.



예식이 시작하기 전에

서둘러 그곳을 빠져나왔다. 

어디선가, 축하해, 잘 살아, 

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불과 몇 년 전, 아니 몇 달 전에

희수가 상상했던 장면이었다.

괜찮은 예식장에서

예쁜 드레스를 입고

보란듯한 축하를 받으며

결혼하는 것.

그래서 사람들의 "잘 살아!"라는

말을 들으며 정말 '잘 사는' 것.



하지만 이젠 그 영화 속에

주인공은 희수가 아니었다.

희수의 영화엔 축복은 없었다.

그저 낡고 허름하며

어쩐지 구겨진, 복수만이 있었다.

그 사실이

희수는 무척이나 슬펐다.






"후..." 



하늘은 맑았다.

전환이 필요했다.

영화는 끝이 났다.

이미 엔딩크레디트까지 올라간

영화를 다시 되감기를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곳에서 한 걸음 멀어질 때마다

감정도 한 덩이씩 떼어 놓고 싶었다.




우울할 땐, 

바닐라 라테를 즐겨 먹는 희수였다.

지금, 당장에라도 커피가 필요했다.

아무 곳에나, 눈에 보이는 어떤 곳에나

들어가서 커피 한 잔을 시켜 먹으리라.

좋아하는 재즈를 들으며

그렇게 비우고 또 비우리라, 마음먹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마침 카페 하나가 눈에 띄었다.

아무도 없을 것 같은

허름한 카페가 희수의 마음에 들었다.



딸랑-



카페 안에 몸을 욱여넣었다. 





사진: UnsplashTim Mosshold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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