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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레몬 사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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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녕 Jun 17. 2024

망각과 기억

아주 어릴 적, 배가 남산만큼 부른 엄마를 보며

희수는 물어본 적이 있었다.




엄마. 나 낳을 때 힘들었다며, 뱃속 아기는 안 힘들게 해?"




그러면 엄마는 희수 손을 꼭 잡아주며

꼭, 이렇게 말했다.




"괜찮아. 사람이 살 수 있는 건

망각의 동물이라서 그런거야."




"망각?"




어리둥절해하는 희수를 쓰다듬으며

엄마는 덧붙였다.




"잊는 거. 다 잊어버리는 거. 희수 낳을 때 힘들었던 거

그 거 다 잊었어. 그래서 괜찮아."




어렸던 희수는, 엄마의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잊는다는 것. 그래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으므로

엄마가 동생을 낳는 날,

희수는 엄마가 그러다 꼬박 죽는 것은 아닐까

두려워 외할머니 품에 안겨 숨죽이며 울고 있었다. 






힘들고 지친 순간들은

바쁘고 정신없는 일상에 묻혀

차차 지워져 갔다. 우진과 현아의 결혼식도

그들을 만나고, 청춘을 갈아 넣은

어린 날의 자신을 버리고 오는 것들도

한낱 꿈결 같이 느껴질 정도였다.




회사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바빴다.

원래 바쁠 시즌이었지만 특히 일손이 부족했다. 

우진, 현아 때문만은 아니었다.

업계에서 평이 좋지 않은 편이었다.

늘 짜디 짠 연봉 때문에 매해 한 두 명은 이직을 하곤 했다. 




평생직장이란 게 없다지만

희수는 처음 들어온 직장에서 가능하면 오랫동안 

일을 하고 싶었다. 사내 환승 연애에

그만둬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상황에서도

희수가 퇴사를 하지 않았던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첫 회사, 첫 직장이었기 때문이었다.








오늘따라 날은 덥고

업무는 쏟아지고

점심 메뉴는 형편없었다.




주경과 함께 맛있는 점심이라도 먹고 싶었지만

마침 주경은 외근 중이었다.

구내식당에서 뜨는 둥 마는 둥 밥을 먹고

일찌감치 자리를 떴다.




점심 식사 자리의 주된 화제는 

현아와 우진의 결혼식.

우진과 희수가 연애했던 사이라는 것을

알리가 없는 사람들은 

희수 앞에서 듣고 싶지 않은 이야기를 

마구마구 쏟아냈다.

말하지 말라고 말할 권리가 없었다.

듣기 싫다면 스스로가 피해야 했다.




무작정 건물을 나와 걸었다.

이제 긴팔 리넨 셔츠는 살짝 더운 느낌이 들었다.

취업 성공했다며 엄마가 큰맘 먹고 사준

검은 슬랙스 역시 계절에 뒤처져 있었다.




모두가 맑고 상쾌한 여름을 향해 가는데

희수만 어쩐지 우중충한 겨울과 봄 사이에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주변을 스쳐가는 사람들은

모두 웃고 있는 것 같고

그들은 걱정 하나 없는 것 같고

희수 빼고는 모두 행복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어디 임금님 귀는 당나귀귀라고 외칠 수 있는

대나무숲이라도 있다면

당장에라도 달려갈 텐데.

현실엔 메아리 되어 울리는,

마음의 짐을 내려놓을 수 있는

대나무숲이 없었다. 




스트레스가 쌓일 때면

말없이 걷던 적이 많다.

임용고시 준비 하겠다면서 

노량진 고시원에서 2년 정도 살 때 생긴 습관이었다.

공부가 뜻대로 되지 않을 때,

모의고사 점수가 형편없을 때,

지원한 지역의 경쟁률이 터무니없이 높을 때,

추석 연휴에 공부한다면서 본가를 가지 않고

독서실에 앉아 자리만 지키고 있을 때,

그렇게 심장이 조일 듯 힘들 때면

희수는 이어폰을 하나 꺼내 들고

운동화 끈을 조여매고 길을 나섰다.




걸으면, 천천히 걸으면

조금씩 마음을 힘들게 하던 생각이 흐려지고 

옅어지고 개운해졌다.

아주 오래전에 살았던 철학자들이

왜 산책을 좋아했는지 알 것도 같았다.




아이리버 엠피쓰리가 아이팟이 되고

아이폰5가 되고, 다시 아이폰 14가 될 때까지

희수는 답답할 때면 꾸준히 걸었다.




가양대교에서 동작대교까지

잠실대교에서 성수대교까지

건대입구에서 잠실까지

노들섬에서 여의도 국회의사당까지

발이 닿는 대로 걸었다.

걷다 보면 개운해지는 그 느낌이 좋았다.

다시 돌아오는 길에 

퉁퉁 부운 다리를 주무르며

많이 털어낸 마음속이 한껏 가뿐하게 느껴졌다.




오늘도 희수는 걷기로 했다.

방향 없이, 목표 없이

일단 걷기로.




퇴사, 이별, 그리고 환승.




갖가지 생각이 떠오를수록 발걸음은 빨라졌다.

희수를 둘러싼 풍경은

빌딩숲에서 

한적한 도로에서

번화가에서

조용한 한강변으로 바뀌었다.

그동안 희수의 마음은

즐거웠다가

슬펐다가

행복했다가

아파졌다.




얼마쯤 걸었을까.

목이 탔다.

물, 아니 커피라도 한 잔 마시고 싶었다.

마침, 눈앞에 보이는 커피숍으로 들어갔다.






사람은 망각의 동물이라

힘들었던 기억은 다 잊는다고 했다.

희수를 낳을 때, 출혈이 심해 생명이 위험했던

엄마였다. 희수가 태어난 날을

엄마는 망각했다.



하지만. 



수술 중 죽을 수도 있다는 내용의

무시무시한 서류에 서명을 한 아빠는 

아직도 그날을 기억했다.

앰뷸런스 소리.

싸늘한 병원의 촉감.

코르스름한 병원의 냄새.

분주하게 움직이는 의료진들 틈에

아무것도 하지 못한, 자신의 무력함.

얼마 지나지 않아

우렁찬 울음소리와 함께 태어난, 희수까지.

희수의 아빠는 그날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본능이 말했다.

여기는, 이 카페는 들어가지 말라고.



그런데 또, 본능이 말했다.

여기라고. 여기로 들어가라고.



딸랑- 



"어서 오세요."




목소리 좋은 중저음의 직원이

기분 좋게 맞이하는 곳.

뜻 모를 말을 남기고

이유 없는 호의를 받고

괜스레 이상한 기분이 들었던 곳.




그날, 그 카페였다.




웃으며 고개를 들던 그는,

마침 지금 들어온 손님이

희수라는 것을 알고는

한층 더 밝게 웃어 보였다.



희수는,

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그날을 잊은 줄 알았던

자신이 사실은 그날을

아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카페는 여전히 아늑했고

평화로웠다.

좋아하는 재즈풍의 음악이 

흘러나오는 곳.

잘생기고 차분하며 친절한 직원이 있는 곳.

그래서 현실과 어느 정도는 동 떨어져 있는 것 같은 곳.



희수는

기어코 

발을 들여 안으로 깊숙이 

들어오고 말았다.



아마도 오늘은

결코 잊히지 않을 것 같다는

느낌이 온몸을 휘감았다. 





사진: UnsplashSincerely M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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