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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녕 Oct 06. 2024

깊은 우물을 품고

학급 서기를 뽑아야 하는 학급 회의 시간. 아무도 선뜻하지 않으려고 할 때, 은수가 손을 들었다. 쇼트커트, 펑퍼짐한 옷, 그리고 무덤덤한 표정이 인상적이었다. 보통 학급 임원(서기는 중요한 임원은 아니다. 임명장 같은 것도 주지 않고, 당연히 가산점(?)도 없다.)을 하겠다고 하는 아이들은 대부분 적극적인 태도로 자신을 어필한다. ‘저 정말 열심히 할 수 있어요!’하는 표정과 말과 몸짓 등으로 나에게 눈빛을 마구마구 쏘아댄다.


그런데 은수는 그런 것이 없었다.


“서기 할 사람?”


이라고 묻는 내 말에 그저 담담히 손을 들었다. 그러니까 어떤 느낌이냐면


‘제가 한 번 해볼게요. 할.... 수 있을 것 같긴 한데...’


하는 느낌? 지금은 은수와 워낙 가깝고, 말하지 않아도 눈빛만 봐도 녀석이 최근에 무슨 일이 있는지, 어디가 아픈지, 친구 사이에 무슨 문제는 없는지 단박에 알아채지만  당시엔 처음 만난 사이가 아닌가. 서기를 해준다고 하니 고맙기도 한데, 잘할 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 반은 걱정도 되는 상황에서, 우리 2반의 서기는 은수가 되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은수는 빛이 나는 아이였다. 따뜻하고 다정했다. 애교가 많지는 않았지만 제 나름대로 마음을 풀어낼 줄 알았다. 학급에 소외된 아이를 먼저 챙기는 따스함은 언제나 다른 친구들이 ‘은수와 같은 모둠을 하고 싶다’는 생각에 닿게 했다. 서기로서의 역할도 누구보다 잘했다. 어쩌면 당시 부반장이었던 현우보다도, 반장이었던 한성이보다도 더 제 역할을 책임감 있게 했다.


나는 어쩐지 옛날 선생님이라서 반장, 부반장, 서기의 역할을 딱딱 나누어서 시키곤 했는데(안 하면 잔소리 폭탄) 은수는 그럴 일이 없었다. 까불거리는 현우가 애들이랑 장난을 치다가 걸려서 혼이 나는 상황에서도 은수는 늘 학급 출석부를 잘 챙겨주었고, 회의록을 잘 기록해 주었다. 깔끔하고 단정한 글씨를 보면 볼수록 참 괜찮은 녀석이란 생각이 들었다.


공부도 곧잘 했다. 전교를 휘어잡는 모범생은 아니었지만 기본은 꽤 탄탄했다. 국어, 영어, 수학, 사회, 과학 등 전 교과에서 두루두루 좋은 성적을 내는 편이었는데 특히 선생님들이 은수를 좋게 보셨다.


“그 반 은수는 애가 볼 수록 괜찮은 것 같아.”

“은수 우리 반이었으면 좋겠어. 우리 반으로 와라~!”


하며 은수를 눈독 들이는(?) 선생님들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알 수 없는 뿌듯함을 느꼈다. 그 때문일까. 수학 선생님께서 은수에게 방과 후 수업을 제안하였고, 은수는 쉬는 시간, 방과 후 시간 할 것 없이 교무실로 찾아와 열심히 수학 문제를 풀었다. 초4 언저리에 머물러 있던 녀석의 수학 실력이 중2까지 올라갔다고 들었던 날, 많이 기뻤던 기억이 난다.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성실하고 공부도 곧잘 하는 은수의 취미는 ‘댄스’. 학교 댄스부 활동을 하며 차곡차곡 실력을 쌓아 가는 중이었다. 무심한듯한 표정은 음악이 나오면 바뀌었다. 분명 겉으론 얌전한데 춤을 출 때는 다른 사람 같았다. 실제로 1, 2학년 때 은수는 축제 무대에서 댄스 공연을 했는데 너무 기특하고 대견해서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우리 00 멋지다!!!! “ 외쳤던 기억이 있다. (내 옆에 있던 학생들이 국어쌤 왜 저러냐면서 쳐다봤었다...)


이러니 어찌 은수를 아끼지 않을 수가 있으랴.


아마 나 아닌 다른 담임 선생님이었더라도 은수를 이뻐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만큼 은수는 내게, 그 1학년 아이들 중에서도 독보적인 존재였다. 담임이어서 좋았다. 녀석을 가까이에서 들여다보며 챙겨줄 수 있어서. 마음속 이야기를 조금씩 들어볼 수 있어서.


사실 우리 둘 다 낯을 가리는 편이어서 친밀감을 느끼기까지는 꽤 시간이 걸렸던 것 같다. 친해지고 싶어 은수에게 다가가면 “네?”., “제가요?” 하며 멋쩍게 웃곤 했다. 나 역시 부끄러울 때(?)도 있었지만 괜히 너스레를 떨기도 하고, 괜히 쉬는 시간에 찾아가서 뭐 하느냐고 관심 보이기도 하면서 그렇게 우리는 서서히 서서히 조금씩 물들어 갔던 것은 확실하다.


은수는 호수 같은 아이라고 생각했다.


잔잔한 물결을 품고 있는 아이. 어떤 돌멩이가 날아와도 묵묵히 품어줄 수 있는 아이. 그래서 많이 의지도 했다. 은수라면, 힘든 선생님의 마음을 알아주지 않을까 싶어서.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2022년, 선선한 가을바람이 불었던가?

따뜻한 봄바람이 불었던가?

후텁지근한 여름바람이 온몸을 휘감고 지나갔던가?

기억이 나지 않는 그 어느 날, 은수와 대화를 나누던 나는


깨닫고 말았다.


은수는, 호수 같은 아이가 아니라

마음속 깊은 우물 하나를 품고 있는 아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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