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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녕 Oct 13. 2024

새벽 두 시의 메시지

우리는 수십 장의 종이를 가득 메우고, 지우기를 반복했다.

이따금씩 글이 끊길 때도 있었지만 침묵은 생각보다 길지 않았다. 성격 급한 내가 은수의 대답을 재촉하긴 했지만 은수는 그런 재촉에 쉽사리 제 감정을 내놓을 아이가 아니었으므로. 그렇게 가늘고 길게 이어진 필담은 그 어떤 대화보다도 깊고 따스했다. 그렇게 겨울이 찾아왔다. 나는 어느새 은수라는 아이에게 조금씩 길들여져 갔다. 은수 역시 담임 선생님인 나의 지도 방식에 조금씩, 익숙해진 듯했다.


상담을 하다 보면 아이들의 특성을 파악하게 된다. 처음 생각했던 것과 다르게 은수는 현실적인 편이었다. 무조건 잘 될 거야라며 희망회로를 돌리는 것은 은수에게 맞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대책 없이 긍정적인 조언만 쏟아내고 싶지 않았다. 세상살이가 녹록하지 않거니와, 실제 나도 얼마나 많은 고뇌와 번민 속에서 살았던가. 대놓고 보여줄 필요도 없지만 애써 숨기고 좋은 면만 보여줄 필요도 없는 것이었다. 대신 나는 말없이 녀석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쪽을 택했다. 그저 묵묵히- 최선을 다해서.


어쭙잖은 공감도 최대한 피하려고 노력했다. 태생이 공감을 잘하는 편이다. 본능적으로 튀어나오는 말은 “그랬구나. “, ”그럴 수도 있겠네. “, “쌤이 예전에 그런 비슷한 일이 있었는데...” 같은 말들 뿐이었다. 진심이 아닌 적은 한순간도 없었으나 혹여나 아주 작은 삶의 경험으로 나온 이야기가 상대에게 불쾌감을 줄 수 있을 수 있다는 생각에 각별히 말을 고르고 골랐다. 한 번 말을 할 때도 (쓸 때도) 수십 번을 생각했다. 그랬구나, 힘들었겠다, 그래, 그랬던 거구나... 비슷한 경험을 했다는 이유로 섣불리 답을 주려 하지 않았다. 답을 정해주는 상담가만큼 마음을 답답하게 하는 사람이 또 있을까 싶어서다.


은수는 조금씩 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14년 동안 살아온 삶의 전부를 보이기도 하고, 그 안의 아주 일부만을 드러내기도 했다. 나는 그저 보여주는 만큼 듣고 느끼고 판단하고 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어느 날 은수가 입을 다물고 아무 말을 하지 않으면 그저 내 삶을 보여주었다. 선생님은 딸이 하나 있는데, 선생님은 어렸을 때 집이 무척 어려워졌고, 선생님은 사실 선생님 말고 다른 직업을 꿈꿨고... 하며 운을 띄웠다. 학교 일하면서 힘들었던 순간엔 (너에게 다 말을 할 수는 없지만) 요새 선생님이 힘들다,며 넋두리도 종종 했다.


너무 무거운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진이 빠질 것 같아 부러 가벼운 이야기만 던진 적도 있었다. 주로 학교 이야기를 자주 나누었다. 오늘 우리 반 누구누구가 수업 시간에 어떤 일을 했었다, 선생님들이 뭐라고 하셨다, 같은 것들. 혹은 아침에 출근할 때 커피를 샀어야 하는데 사지 못했다, 피곤해 죽겠다, 같은 것들. 주된 화제 중 하나는 점심시간에 점심을 먹지 않고 윤지, 재인이랑 놀고 있을 때마다 했던 잔소리다.


“왜 점심을 안 먹어!”

“밥을 먹어야 기운이 나지!? “

“오늘도 너 점심 안 먹었지? “


마치 이모가 조카를 들들 볶는 것처럼 나는 끊임없이 은수를 찾고 찾아 녀석의 안부를 살폈다. 아파서 자주 지각하고 가끔은 결석까지 하는 녀석을 어찌 신경 쓰지 않을 수 있을까.


한 번은 14살의 아이가 감당하기 힘든 삶의 흔적이 보이던 날이 있었다. 나라면 견디지 못했을 일을 묵묵히 제 마음속에 덮어둔 것을 불현듯 알아차린 날. 더 이야기를 들어주고 싶으나 당장 집에서 나를 기다리는 딸 때문에 시간을 낼 수 없었다. 이대로 마무리 짓기엔 굉장히 찜찜했다. 어디에든 감정을 쏟아낼 공간을 마련해주고 싶었다. 맏이로 살아와 제대로 제 마음 들여다본 적 없을 은수에게, 과감히 제안했다.


“은수야. 너무 힘들고 지쳐서 온갖가지 마음이 소용돌이치는 날이 되면, 그런 순간에 누군가가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선생님한테 카톡해. 새벽 1시고 2시고 3시도 괜찮아. 주말도 좋아. 답이 느릴지언정 꼭 해줄 테니 꼭. 보내야 해. 알았지?”


처음엔 놀라던 은수였다. 그래도 될까. 아무리 내가 힘들어도 선생님께 새벽에 연락을 해도 되는 것일까. 실례가 되는 일이 아닐까. 하고 머릿속으로 수만 가지 생각을 하는 게 보였다. 난 몇 번이고 녀석을 안심시켰다.


“괜찮아, 괜찮아, 선생님은 한번 잠들면 절대 깨지 않아. 그러니까 걱정 말고 보내.”


그러면 은수는 무덤덤한 얼굴로


“네. 선생님.” 하며, 대답해 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아이의 울음에 잠이 깨 몇 시인가 하고 습관적으로 휴대폰을 찾아보는데, 새벽 2시경에 메시지가 한 통 도착해 있었다.


발신인은-

‘은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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